대원군과 전주이씨
83.대원군과 전주이씨
흥선대원군(1820년 ~ 1898)은 영조의 5대손이자 남연군의 넷째 아들이다. 고종의 아버지로 1843년 흥선군(興宣君)에 봉해졌으며, 왕족에 대한 견제를 피하기 위해 파락호 행세를 했다. 1863년 아들인 고종이 즉위하자 섭정을 했다.
근대사에서 흥선대원군만큼 극단적인 평가를 받는 인물도 드물다. 서원철폐나 호포제를 도입한 개혁가라고 주장한다. 반면 쇄국정책으로 조선의 근대화를 늦춘 인물로 평가절하되기도 한다.
대원군이 첫 개혁 대상으로 삼은 것은 비변사였다. 국방경비를 위해 설립된 비변사는 임진왜란 이후 기능이 확대됐다. 19세기에는 군사권과 재정 및 인사권까지 통괄하며 권력의 중심에 있게 된다.
원래 국정최고기구인 의정부는 물론이고 임금조차 형식적인 존재로 전락했다. 대원군은 안동김씨가 쥐고 있던 비변사 개혁을 통해 세도정치를 타파하고 왕권을 확고히 하고자 했다.
서원철폐 문제 역시 왕권 강화 전략과 맞물린다. 서원은 원래 유생의 교육을 담당하는 사설교육기관이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수탈기관으로 변질됐다.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을 기리기 위해 세운 화양동 서원의 횡포는 극심했다. 화양동서원 옆에 있는 만동묘를 두고 당시 유행가에서는 ‘임금 위에 만동 묘지기가 있다’고 할 정도였다. 대원군은 “백성에게 해가 된다면 공자가 다시 돌아와도 안 된다”며 서원철폐를 강행해 전국 유생들의 집단 반발에 직면하게 된다.
쇄국정책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논쟁거리다. 당시 대원군은 프랑스군을 이용해 급부상하던 러시아를 견제하겠다는 실용주의 외교정책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대원군은 갑자기 입장을 바꿔 베르뇌 신부를 처형하는 등 천주교 탄압에 들어갔다.
대원군은 당초 서양에 대해 상당히 '인간적인 태도'를 취한 인물이었다. 1866년 미국 선박 서프라이즈호가 조선 연해에서 조난을 당하자, 대원군 정부는 조난 선박을 구조하고 인도적으로 대우했다. 신미양요(1871년) 시기에도 조난당한 프러시아(독일) 선박을 구조하고 인도적 조치를 베푼 적이 있다.
19세기 중엽까지만 해도 조선·청나라·일본 3국은 기본적으로 쇄국정책을 취하고 있었다. 대원군도 동아시아의 일반적인 국제정책을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1860년대의 서양에 대한 문호개방은 단순한 문화교류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1840년에서 1860년에 걸친 두 차례의 아편전쟁은 이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서양에 대한 문호개방은 국가주권을 일정 부분 훼손당하는 것을 의미했다.
문호개방을 통해 조선이 근대화될 것이라는 보장을 기약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문호개방은 개방하는 쪽과 들어오는 쪽이 상호 공존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들어오는 쪽의 국력이 압도적으로 우세하다면, 이는 문호개방이 아니라 '주권개방'인 셈이다.
대원군은 서양세력이 중국에 대해 치욕을 강요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서양세력이 조선에 들어오면 조선이 근대화될 것'이라는 전망이 어려웠다. 대원군이 서양에 맞선 것은 서양에 대한 문화적 거부감 때문이 아니다. 당장에 나라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절박감 때문이었다.
조선이 1882년부터 미국·영국·독일 등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것은 기본적으로 성격이 다르다. 대원군은 병인양요·신미양요를 통해 '서양의 군사력이 생각보다 그리 강하지 않은 것 같다'는 판단을 했다. 그래서 문호개방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우리나라 이씨는 한국계와 중국계, 그리고 기타로 나눈다. 한국계는 신라6성의 하나인 경주이씨에서 갈라져 나간 것이다. 6성이란 신라 유리왕 9년(서기32년) 6촌을 개정하여 사성(賜姓)한 성씨들을 말한다.
양산촌장 알평에게는 이씨(李氏), 고허촌장 소벌도리에게는 최씨(崔氏), 대수촌장 구례마에게는 손씨(孫氏), 진지촌장 지백호에게는 정씨(鄭氏), 가리촌장 기타에게는 배씨(裵氏), 고야촌장 호진에게는 설씨(薛氏)를 하사했다.
중국계로는 연안이씨(延安李氏), 고성이씨(固城李氏), 안성이씨(安城李氏) 등과 같이 시조가 중국에서 건너온 성씨들이다. 기타계로는 안남국(월남)에서 망명해온 화산이씨(花山李氏), 김해허씨(金海許氏)에서 분적한 인천이씨(仁川李氏) 등이 있다.
왕실의 족보는 선원선계(璿源先系), 선원세계(璿源世系), 선원파계(璿源派系)로 나눈다. 임금의 조상은 `선원(璿源)`이라고 한다. 선(璿)이란 옥구슬이라는 의미이므로 임금의 조상을 `구슬의 근원` 또는 `구슬 같은 뿌리`라는 뜻에서 이런 용어를 썼다.
전주이씨는 시조부터 17세 이양무까지를 선원선계(璿源先系)라 한다. 17세까지의 직계와 방계를 모두 포함한다. 시중공파(侍中公派), 평장사공파(平章事公派), 주부동정공파(主簿同正公派) 등이 이에 속한다.
그리고 추존왕인 목조(穆祖) 이안사부터 마지막 순종까지 역대 왕의 세계를 선원세계(璿源世系) 또는 선원본계(璿源本系)라 한다. 추존왕 4대와 태조부터 순종까지 20세를 합치면 모두 24세의 세계를 의미한다.
그리고 목조의 5왕자부터 대군(大君)이나 군(君)의 파계를 선원파계(璿源派系) 또는 선원속계(璿源續系)라 한다. 양녕대군파, 효령대군파 등이 이에 속한다. 현재 86개 파종회가 있다.
17세 이양무는 부인 이씨(李氏)와의 사이에 이안사(李安社), 이영필(李英弼), 이영밀, 이영습 등 4명의 아들을 두었다. 안사는 후에 목조대왕으로 추존 되어 선원세계(璿源世系)가 된다. 영필과 영밀은 자손이 없었고, 넷째 영습은 주부동정 벼슬을 해 주부동정공파의 파조가 된다.
출처 : 정복규의 역사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