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이씨 운천군파 (비금소종회)

전주이씨 운천군파 비금종중 약사

블랙썬 2012. 12. 24. 15:39

 

崇祖 惇宗

 

 

 

 


 

 

 

 

 

전주리씨 성종대왕 왕자

운천군파 비금 종중 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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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리씨 성종대왕 왕자

 

운천군파 비금 종중 약사

 

2008. 5. .

 

표 지 설 명

 

 

 


 

서양의 귀족 명문가는 그들 명문가를 상징하는 문양(文樣)을 새긴 인장(印章)을 갖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반상이 뚜렷이 구분 된다고 자처하면서도 그 집안을 상징하는 문양 (文樣)을 갖고 있는 성씨는 우리 전주리씨 뿐이다.

좌의 문양(文樣)은 ‘오얏나무’꽃 속에 ‘宗’자를 넣어 우리 전주리씨(全州李氏)를 상징하는 문양(文樣)으로 하였는데 ‘오얏’의 열매가 ‘자두’인것을 아는 사람이 의외로 적어, ‘오얏나무’는 곧 ‘자두나무’임을 밝혀둔다.

오얏 꽃속의 ‘宗’자는 우리 모두는 왕족의 씨족임을 나타내고 바탕색의 녹색은 조선왕조를 창건하신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의 건국 이념이신 온 백성을 고루 온화하게 품는다는 뜻이 담겨 있다.

숭조돈종(崇祖惇宗)은 1922년 우리 전주리씨 대동종약소 창설에 즈음하여 초대 총재이신 의왕(義王)께서 처음 하신 말씀으로 우리 모두는 종헌됨을 기꺼이 생각하고 선조의 자손된자는 그 누구든 멀고 가까움을 논하지 말고 모두 가까운 친족으로 생각하며 종규를 지키고 법률에 저촉됨이 없이 서로 면려하여 조상을 숭배하고 친족의 정을 돈독히 하라는 뜻이어서 우리가 반드시 지키고 실행해야 할 교훈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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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주리씨(全州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

 

우리 전주리씨(全州李氏)는 다른 많은 본관의 이씨(李氏)들보다 그 근원이 매우 깊어 신라시대로부터 시작된다. 우리 전주리씨(全州李氏) 시조(始祖)의 휘(諱)는 한(翰)이고 호(號)는 견성(甄城)공(公)으로 신라 후기 문성왕 때 사공(司空)의 높은 벼슬을 한 분으로 신라 태종왕의 10대손 군윤-은의(軍尹-殷義)의 딸과 혼인하였다. 그 후 대대로 신라에서 벼슬을 해오다 8세손 긍휴(兢休)에 이르러 고려조에서 사공(司空)의 벼슬을 하였고 시조 견성(甄城)공(公)이 전주에 모셔진 조경묘(肇慶廟)에 배양된 것은 시조께서 승하 하신 900년 후인 1771년 영조 47년의 일이다.

우리의 시조 견성(甄城)공(公)께서 활약하던 시대가 장보고가 완도 청해진 대사로 있으면서 해상 무역을 장악할 때로 지방에선 내란이 자주 일어나 중앙 정부의 신뢰를 받지 못하던 시기라 경주 사람이 아닌 지방 전주 사람으로서 경주의 기라성 같은 경사(京師) 귀족 자제들의 경쟁을 물리치고 사공(司空)과 같은 높은 벼슬에 오르고 왕의 후손과 결혼할 수 있었던 것은 학식과 문장이 탁월하고 덕망이 높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전주리씨가 언제부터 전주에 세거(世居)하여 살았는가는 완산실록(完山實錄)의 기록에 의하면 우리의 시조이신 견성(甄城)공(公)께서 원래 중원(중국) 땅에 살던 하늘이 내리신 성인이셨고 총명하기가 과인하고 재질이 뛰어나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안다는 천재적인 분으로 주위의 칭송과 시기를 한 몸에 받고 자라 15세에 중국 한림원에 들어갔다. 그의 계모되는 주씨가 수다하고 까타로웠으나 효도로 극진히 섬기어 극복해 왔는데 마침 「이수하(李樹下) - 오얏나무 아래에 반드시 왕자의 기운이 서려있다.」의 동요가 나도는데다 배씨 성을 가진 사람이 역모를 꾀한다고 음해하여 생명의 위험을 느껴 바다를 건너 동국(신라)땅 전주로 와 토착해 살게 되었는데 이때의 나이가 약관에도 미치지 못한 18세였으나 문장이 뛰어나고 학식이 깊으며 덕망이 높다는 소문을 듣게 된 문성왕이 불러 사공의 벼슬을 내리고 태종왕의 후손과 혼례를 올리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18세손 안사는 전주에서 대대로 살아온 호족이었는데 새로 부임해 온 지주가 탐익하여 그를 규탄하니 지주가 군사를 휘동하여 보복하러 드는지라 이를 피해 강원도 삼척으로 옮겨 갔는데 이 때 그를 따라간 민호(民戶)가 170여호 였다고 한다.

그 후 전주 지주가 산성 별감이 되어 삼척으로 부임 한다는 소식을 듣고 보복이 두려워 다시 함경도로 옮겨 갔다가 원나라 간동으로 가 그 곳에서 5천호의 다루하치(達魯花赤)벼슬을 지냈고 안사의 아들 행리, 행리의 아들 춘, 춘의 아들 자춘 등이 천호의 벼슬을 계승해 왔는데 자춘은 고려 공민왕 때 공을 세워 대중대부(大中大夫)에 오르고 벼슬이 시복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시조 한의 22세손인 성계(成桂)에 이르러 흐트러진 고려의 국정을 바로 잡고 민심을 수습하여 좌시중(左侍中) 배극렴(裵克廉)등 52인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오르게 됨으로써 조선 왕조를 창건하고 우리 전주리씨의 중시조가 되었으며 그 후 정종, 태종, 세종 등 열성조를 거쳐 27왕 519년간 연금상계(連錦相繼)하여 조선왕조를 이끌어 왔다.

우리의 계통을 살펴보면 시조로부터 왕이 되기 이전 즉 17세 까지를 선원선계(璿原先系)라 하고 조선왕조를 창건하신 태조(성계)가 왕위에 등극 하시어 4대조 (목조,익조,도조,환조)를 선대왕으로 추존 하였는데 그 왕계를 선원세계(璿原世系)라고 한다,

태조(성계)가 왕위에 오른 뒤 자손이 크게 번성 현달하여 여러 갈래로 나뉘어 지는데 선원파계(璿原派系)란 제왕(帝王)은 불감조기조(不敢祖基祖)라 하여 조상이지만 조상으로 칭할 수 없기 때문에 대군과 군을 파계로 하여 이어온 계통을 말한다.

한편 분파된 파계를 살펴보면 목조 이전의 선계에서 갈라진 파 즉 시조 한의 15세손인 단신(端信)을 파조로 한 시중공파(侍中公派) 16세손인 거(居)를 파조로 한 평장사공파(平章司公派) 18세손인 영습(英襲)을 파조로 한 주부동정공파(主簿同正公派)등 3파가 있고 목조, 익조, 도조, 환조등 4조의 자손에서 18파가 있으며 태조이후 역대 왕자파가 98파 태조의 형인 원계파를 합쳐서 모두 123파가 있는데 간혹 입양 관계로 두 파가 한 파가 되는 등 사실상 그 수가 줄어든다.

본관의 유래를 상고해 보면 전주리씨(全州李氏)의 본관을 달리 일컬어 완산(完山)이라고도 하는데 완산(完山)이 전주(全州)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리서에 의하면 완산은 본래 조그마한 산으로 전주부의 남쪽으로 3마장 쯤 되는 곳애 있으며 부의 칭호가 이 산으로 연유 했다 한다. 또 일컫기를 남복산(南福山)이라고 하는데 고을이 생긴 시초부터 이산을 국성(國性:임금의 성씨)의 본관으로 제왕(帝王)의 시신이 모셔진 성역이어서 짐승을 기르고 농사짓는 일을 금했다한다. 그러나 고래로 전주리씨를 일컬어 본관을 말 할 때는 전주로 하고 군호(君號)를 줄 때는 완산으로 하여 고려 때 도조의 셋째 아들 자선(子宣)을 완산백(完山伯)으로 봉했고 환조(桓祖)를 완산군(完山君)에 봉했으며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도 잠저시(潛邸時)에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으로 봉했다.

본관의 유래를 상고해본 것 처럼 시조의 묘소가 전주에 있고 시조부터 18세손인 안사까지 전주에서 호족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본관을 전주로 하게 되었다.

 

 

2. 성종대왕(成宗大王) 운천군(雲川君) 약사(略史)

 

우리의 선원파조(璿原派祖) 운천군(雲川君)께서는 조선 왕조의 중흥을 이룩하신 성종대왕(成宗大王)의 14남으로 휘는 인(小寅 ) 시호는 소회(昭褢)公이다. 운천군은 숙의홍씨(淑儀洪氏) 소생의 7왕자 완원군(完原君), 회산군(褱山君), 견성군(甄城君), 익양군(益陽君), 경명군(景明君), 운천군(雲川君), 양원군(楊原君)과 3옹주 혜숙(惠淑), 정순(精順), 정숙(靜淑) 중의 6남이다.

운천군은 1490년(성종21) 11월 24일(임인일) 태어나 1524년(중종19) 5월 14일 향년 35세로 별세 하였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성종대왕은 소회공(昭褢公)의 시호(諡號)를 내리고, 그 뛰어남이 남달라 9세(1498년)에 운천군으로 봉하였다. 그러나 연산군의 난폭한 통치와 왕자들에 대한 박해로 날마다 근심 걱정으로 세월을 보내다 중종반정으로 시름을 거두고 종사에 크게 공헌해 갈 즈음 장년의 한창 나이에 별세했다. 중종대왕도 3일간 정사를 폐하고 애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운천군은 형조참의 증 좌찬성 인손(仁孫)의 딸 안동권씨와 혼인하여 4녀만을 두었다. 사위는 사헌부감찰 이구(李山區), 신천군수 이종효(李宗孝), 종묘서령 박순년(朴舜年), 선감주부 이경종(李櫦宗) 등 이며(세 사위 성씨의 이(李)는 본관이 다름) 후사가 없어 형인 완원군의 아들 수례(壽禮 : 후에 이천군(伊天君)으로 봉함)를 계자로 삼았다. 따라서 오늘의 운천군의 후손은 혈통적인 측면에서는 완원군의 후손인 것이다.

운천군의 계자인 가덕대부 이천군(伊天君)은 남달리 뛰어난 인품과 극진한 효심을 지녔다. 아버지 완원군과 어머니 허씨 사이에서 2남 2녀 중 차남으로 1508년(중종3) 12월 계유일에 태어나 1568년(선조1) 6월 임인일에 별세하여 향년 61세이다.

특히 이천군은 종친의 어려운 일에 헌신적이었다. 중종, 인종 국상의 집례자로 크게 공헌을 했다는 기록만으로도 이를 알 수 있다.

이천군은 선릉 참봉 황정복(黃廷福)의 딸(후일 한산군부인韓山郡夫人으로 봉해짐)과 혼인하여 4남 3녀를 두었다. 의령부정:부(義寧副正:溥), 의흥부수:급(義興副守:伋), 의양군:수(義陽君:修), 의신군:비(義信君:備)등 4남은 모두 출중한 인걸로 국사와 종묘사직에 봉헌하였으며, 그 손자 손녀들이 번창하여 사람들이 이르기를 “이천(伊天) 종실의 어질고 귀한바가 끊임이 없으니 마장리(이천군 묘가 있는 곳) 현당(玄堂) 음덕이 백세토록 넘치고 있는 것이다.”라고 칭송하기도 하였다.

 

이천군의 장남인 의령부정은 1534년(중종29) 8월 28일 태어나 신인(慎人)진주 강씨와의 사이에 7남을 두었으며 1595년 2월 4일에 61세의 세수를 누리고 별세 하셨다.

의령부정의 장남 청산부수(菁山副守) 서(瑞)는 1549년(명종4) 10월 2일 태어나 숙인(淑人) 파평 윤씨와의 사이에 1남 2녀를 두었으며 1587년(선조20) 2월 20일 38세의 세수를 누리고 별세 하였다.

그러나 이토록 가계의 번성을 누렸던 종가가 간난(艱亂)의 가시발길과 몰락의 풍진에 휘말리는 풍운을 맞게 된다. 그것은 1636년(인조14) 병자호란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때 왕자와 비빈은 강화로 피난을 하였으나 인조대왕은 길이 막혀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다. 임금의 행차가 호병(湖兵)의 포위속에 들게 되니 백성들의 병화(兵禍)는참혹하기 그지 없었다.

그 중에서도 종가인 청산부수(菁山副守) 서(瑞)의 장남 시형(時亨) 댁은 그 처참함이 더욱 비길 데 없었다. 마침 그 때 시형은 변방을 지키고 있었다. 그의 신부인 청송심씨와 5대손 훈련판관 원정(元禎)과 숙부인 거창신씨는 호병들의 난동과 노략질에 굴하지 않고 칼에 엎드려 자결하였으며 시형의 아들(6대손) 충의위(忠義衛) 몽석과 어린 누이동생은 나이가 겨우 8세 6세였음에도 포로가 되어 심양으로 끌려 갔다. 다행히 연로한 노비 한 사람이 마니산(摩尼山)에 숨어 있다가 호군들이 철수한 후 세분의 시신을 거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 후 운천군의 현손 시형은 병란 중에 북방임지에서 귀가 하였으나 가족도 집도 다 잃어버린 처참한 나그네에 불과하였다. 이런 사정을 전해들은 인조대왕은 이를 애석히 여기고 토지와 은 백 냥과 집을 하사하고 또한 심양으로 잡혀간 몽석 남매도 돌아오게 하였다. 시형은 이 망극한 천은(天恩)에 만의 하나라도 보답하고자 다시 스스로 압록강 수비를 위해 임지를 향해 떠났으나 도착하자마자 병을 얻어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1639년 (인조 17) 3월 29일에 별세 하였다.

아버지마저 잃게 된 몽석 남매는 의탁할 곳이 없어 연로한 노비가 보살폈으나 왕자의 세손답게 의젓하게 장성하여서 병자호란때 자결한 세 분(신부인 청송심씨, 훈련판관 원정, 숙부인 거창신씨)의 묘를 강화로 모셨으며, 아버지 시형의 묘소도 압록강으로부터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마장리 운천군 묘 아래에 옮겨 모셨다.

이 후 종가는 원주 지방 금마촌(金馬村) 유동(柳洞)에서 살다가 다시 노성(魯城 : 현재 平昌)으로 이주 하였는데 이 때 종가의 내력을 잘 알고 있는 ‘노성사림(魯城士林)에서 이 슬프고 절의 있는 사연을 숙종대왕에게 상소한 바, 숙종대왕은 즉시 세분을 추앙하는 정문(㫌門)을 세우고 조묘(祧廟 - 조상의 묘를 멀리 옮겼다는 의미)를 짓도록 강원 도백에게 어명을 내렸다. 그러나 3백여 년이 지나는 동안 비바람에 씻기고 퇴락한데다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마장리의 운천군 묘와 떨어져 있어서 관리에 어려움이 많았다. 이제 후손들이 뜻을 합쳐 마장리로 옮겨 별묘로 모시고 단장을 새로 하였다.

현재 종현들은 뿔뿔이 흩어져 지내고 있으나 종친회를 중심으로 일심협력하여 해마다 제를 지내는 등 조상을 받들며, 운천군 자손으로서의 긍지를 안고 멸사봉공가화번창에 매진하고 있다.

 

 

3. 성종왕자(成宗王子) 운천군파(雲川君派) 비금종중(飛禽宗中)의 유래

 

성종대왕(成宗王子)의 16왕자 중 15번째 왕자님이신 운천군(雲川君) 조부가 우리의 파시조(派始祖)이신데 운천군 조부께서 35세의 나이로 돌아가실 때 아들이 없어서 같은 숙의홍씨(淑義洪氏)의 소생인 완원군(完原君)의 둘째 아드님이신 이천군(伊川君)을 양자로 입적시켜 대를 이으셨다.

이천군(伊川君)의 장남이 ‘의령부정:부(義寧副正:傅)’이시고, 이분의 4남이 우산부령:기(牛産副令:玘)이신데 이분의 손자이신 본정(本禎)조부께서 진도로 귀양을 오시게 되었다.

소위장군(昭威將軍) 본정(本禎)조부님은 아버지 시응(時膺)과 어머니 광산김씨 사이에서 1598년에 차남으로 태어나셨다. 본정(本禎)조부께서는 문무를 겸비한 인재(人才)로 광해주(光海主) 정사년(1617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20세 약관의 나이에 소위장군(昭威將軍) 정4품에 등용 되셨다.

조선 14대 임금이신 선조와 공빈김씨 사이에서 둘째 왕자로 태어난 광해군(서출)은 우여곡절을 겪고 왕위에 등극하여 왕권을 안정시키는 과정에서 임해군(광해군의 동복 형), 영창대군(인목황후 소생: 적출) 등 왕위를 위협하는 인물들과 그들을 떠받치고 있던 서인과 남인 세력을 차차 제거하고 무오년(1618)에 인목대비마저 폐출시키는 등 사색당파에 휘말려 폐륜행위가 잦고 정치가 문란해지자 성품이 강직하고 불의와 타협할 줄 모르는 본정(本禎) 할아버지는 이를 탄핵하는 상소문 「아성조 이후 혹세난민 무이(我聖祖 以後 惑世亂民 無二(태조대왕께서 나라를 창건하신 이후 역대 임금 중에서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는 둘도 없는 왕이다)」라는 상소문을 올린 것이 화근이 되어 역모로 몰려 무오년(1618)에 전라도 진도 가사도로 귀양을 오시게 되었다(戊午年 珍島 謫居).

1623년 3월 12일 광해군의 폐륜행위에 불만을 품은 세력들이 무력정변을 일으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능창군을 왕으로 옹립하게 되었다.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왕위에 오른 능창군은 광해군에 의해 희생된 영창대군, 임해군, 인목대비 등의 신분을 복원시키고 나머지 삭탈관직자와 유배자들의 관직을 복원시키고 귀양을 풀어 신분을 복귀 시켰는데, 소위장군 본정(昭威將軍 本禎)할아버지께서는 유배지가 전라도 진도 가사도 외딴섬이어서 뱃길이 험란하여 심부름하는 사람이 고의로 전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알려주어야 할 사람이 정적(政敵)이어서 일부러 방면소식을 알려주지 않아 방면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지 못하고(伋未蒙放) 무인년(1638년) 8월 25일 41세의 나이에 돌아가셔서 가사도 유배지에 묻히셨다.

통정대부(通政大夫) 공조참의(工曺參義) 세문(世文) 할아버지는 아버지 소위장군 본정과 어머니 숙부인 월성 김씨 사이에서 1633년 1월 15일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나 아버지의 유배지에서 성장하여 한양(지금의 서울) 본가를 찾아 귀경길에 올랐으나, 전라도 장성에 이르러 여독으로 병석에 눕게 되었다. 세문 할아버지는 그곳 장성에서 병 치료에 심혈을 기울였으나 병은 차도가 없고 점점 쇠약해지자 한양 본가를 찾아가는 일을 접고 장성 북면에 정착해 사시게 되었으며 슬하에 두남(斗南) 두학(斗學) 형제를 두시고 1713년 9월 25일 한 많은 여생을 마치게 되어, 전남 장성 북면에 묻히셨다.

전라도 장성 북면에서 태어나 성장한 두남(斗南) 조부께서는 본정(本禎) 할아버지가 유배지 진도 가사도 섬에 묻혀 계시니 본정 할아버지의 유해를 찾아 꼭 선영에 모셔야 한다는 아버지(世文)의 간곡한 유언을 실행코자 진도 가사도를 찾아 가신다는 것이 비금 당두리에 이르게 되었으나 그때만 해도 교통이 불편해서 비금도 사람들이 가사도가 어디쯤에 있는지도 모르고 뱃길도 없어 본정 할아버지의 묘소를 찾겠다는 생각을 잠시 접고 비금면에 정착하고 말았다.

총각의 몸으로 비금도에 입도(入島)하신 두남(斗南) 할아버지는 광대리에 사시는 함양박씨와 결혼하여 용소리에 터전을 잡아 가세를 형성하였으니 우리가 바로 이 분의 후손들이다.

우리 후손들은 본정할아버지의 무덤을 찾아 선영에 모시겠다는 두남(斗南)조부의 효행심 덕택으로 묘소를 잃어버리지 않고 지금도 격년제로 참배의 기회를 가질 때면 진도군 지산면 가학리에서 가사도까지 모터선으로 건너가 참배하곤 하는데 ‘가학리’ 주민들은 “소위장군(昭威將軍)의 후손들이 교통도 불편한 머나먼 이곳 가사도까지 조상의 묘소를 찾아 참배왔다”고 소곤거리는 소리를 들을 때면 장군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을 갖게 된다.

종가(宗家) 상량(上樑)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집을 지은 해가 가경(嘉慶- 중국연호)11년이라고 하였으니 1806년이고 상묵(尙黙)조부께서 17세 때이고 보니 두남조부의 손자님이신 곤(坤)조부께서 지은신 것으로 이 때 9칸 겹집으로 그 정도의 큰 집을 지은 것으로 보면 대단한 가세였음을 짐작케 한다.

입도조(入島祖) 두남(斗南)조부의 아드님이신 부용(富龍)조부께서는 1746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함경도 변방을 수호하신 공적을 인정받아 벼슬이 절충장군 중추부사 당상관에 이르렀으며 1795년 (정조19년) 본정(本禎) 조부의 명예를 회복하는 교지를 받는 것을 비롯해서 정조대왕게서 ‘건융(乾隆) 60년(1795) 학생 이세문 증 통정대부 공조함의자(學生 李世文 贈 通政大夫 工曺參義者)’라는 세문 조부에게 통정대부에 봉하는 교지가 내려졌으며 두남(斗南) 조부에게도 통정대부에 봉하는 교지가 내려졌는데 이 교지들은 지금 장손이신 귀문(貴文) 종현님이 소장하고 계신다.

두남(斗南) 조부의 고손이신 수성 조부께서는 문장가로?하은집(霞濦集)?을 남기셨는데 책으로 발간키 위해 외지인(해남인)에게 의뢰하였으나 끝내 되찾지 못해 후손인 저희로서는 정말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개화기에 들어서면서 비금의 초대 면장을 지내신 이봉래(李鳳來)면장님의 업적은 지대하여 면민들이 공적비를 세워 줬는데 그 내용은 「행공집무이십사모 학교육영 해사숙수 국지해제 민토복기(行功執務二十四慕 學校育英 該事夙受 國地解際 民土復其) : 면장으로 24년동안 재직하시면서 많은 공적을 남기셨는데 맡은바 책무는 신속히 처리하시고 육영사업에도 힘썼으며 국유지를 사유지화하여 면민들에게 경작케 한 공이 커 면민의 정성을 모아 공적비를 세운다」라는 공적비를 세워준 것은 우리 가문의 자랑이었다. 지금도 각계에서 전주리씨(全州李氏) 운천군파(雲川君派) 자손으로서 자기의 본분을 다하며 각계의 추앙을 받고 있는 형제가 많다는 것 또한 우리 가문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문집의 내용은 충․효와 선행덕목의 내용으로 짜여 졌는데 조부님의 기억에서 생각나는 문장의 한 구절을 소개하면 「이득전지 난득형제 경조목덕(易得田地 難得兄弟 敬祖睦德)」라 해서 재물과 영화는 얻기 쉬우나 형제는 얻기 어려운 것이니 형제를 소중히 여기고 웃어른을 공경할 것이며 자손들끼리는 화목 하라는 교훈이어서 오래도록 우리 문중의 가훈(家訓)으로 내려 왔다.

전국 각지에 흩어져 맡은 분야에서 본분을 성실히 수행하며 남보다 앞서가는 사람이 됨은 물론 2세 교육에도 정열은 쏟으면서 형제애의 정을 돈독히 나누며 살아갈 것을 다짐해 본다.

 

 

4. 조경단(肇慶壇)

 

전주리씨(全州李氏)의 시조(始祖)이신 신라(新羅) 사공(司空公) 휘(諱) 한(翰)의 묘단(墓壇)이다. 소재지(所在地)는 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 덕진동에 있다. 전주부(全州府)의 동쪽 10리쯤 되는 곳에 오목대(五木臺)가 있는데 보통의 둔턱이 봉긋이 솟았을 뿐이다. 여기에 오르면 읍성의 백성들이 모여 사는 여염(閭閻)집들이 손바닥을 들여다 보듯 다 볼 수 있는 전주부의 미목(眉目)같은 곳이다.

여기에 우리 전주리씨 시조이신 신라 사공공(司空公) 리한(李翰)의 묘단이 있게 된 내력을 상고해 보면 대(臺) 동쪽에 발산(發山)이 있다. 발리산(發李山)이라 일컫기도 한 이 산 밑에 자만동이 있어 이곳에서 우리의 조상이 살았다고 고을 백성들이 장군수(將軍樹) 호운석(虎隕石)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옛 정취를 이야기하고 있으며, 왜구가 남원, 운봉에 들어와 노략질을 하며 백성들을 괴롭힐 때 우왕 6년(1380) 우리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께서 전라감찰사가 되어 왜장 ‘아지발도’를 격퇴시키고 개선(凱旋) 하던날 오목대(五木臺)에 종족을 불러 모아 놓고 연(宴)을 베풀며 이곳이 우리 선조들의 얼이 서려있는 곳이라고 자랑스럽게 말씀하신 것이 지명(地名)이 되어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있다.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께서는 새 왕조를 창건하시고 이 곳에 능터를 미리 정하여 봉분을 세우고 수호군을 두어 건지산 묘역 일대를 수호하게 하였으며, 역대 왕조도 관찰사에게 명하여 특별히 관리하는데 정성을 다해왔다.

시조께서 승하하신 900년 후 영조 47년(1771) 영조대왕은 묘의 경계를 정하고 묘역 안에 있는 백성들의 묘를 파가도록하고 전주는 제왕(帝王)께서 탄신하신 고향으로 나무 한 그루 돌 한 개라도 소중히 해야 하는데 하물며 제왕(帝王)의 시신이 모셔져 있는 묘역 내에서 농사를 지으며 짐승을 기를 수 있겠는가? 하여 묘역 안에서 농사짓는 일과 짐승을 기르는 일을 금했으며, 감관과 산직을 두어 관리하게 하고 중신을 시켜 왕자봉 아래를 묘처럼 꾸미게 하니 드디어 묘 형태가 갖추어졌다.

정종조에 이르러 영건청을 설치하여 단을 모으고 담을 들러친 다음 조경단이라 칭하고 고종황제께서 1899년 5월에 이 곳에 단을 모시고 매년 제사를 모시게 하여 매년 4월 10일 제사를 모시고 있으며 영구 보존을 위해 단을 중심으로 450정보의 단역을 마련하고 옛부터 비석이 있었으나 글씨가 마모되어 알아볼 수 없어 고종황제가 비문을 짓고 윤용구가 칙서를 받들어 글씨를 써 ‘대한조경단비(大韓肇慶壇碑)’와 비각을 세우고 “우리 후손들이 대대손손이 억만년 토록 섬길 것을 바란다.”라고 하셨다

 

 

5. 백우금관(百牛金棺)의 전설

 

강원도 삼척읍에서 서쪽으로 16km쯤 떨어진 곳에 노동산(盧洞山)이 있다. 그 산에 우리나라 제일의 명당인 준경묘(濬慶墓)가 있는데 그 묘의 주인은 조선 왕조를 창건하신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4대조 목조대왕(穆祖大王)의 선친인 양무(陽茂)이다. 산의 형상은 태백에서 시작하여 태백산맥의 준령을 타고 내려오다가 두타산(頭陀山) 아래 노동(蘆洞)에 이르러 형세가 뛰어나게 크고 호랑이가 엎드린 형상이다.

묘의 관리상황을 살펴보면 조선 오백년 동안 열성조께서 오랜 세대 동안 추모하여 왔고 관찰사에게 명하여 묘역을 가꾸어 왔으며 선조를 승봉하는 절차가 극진하였으며, 묘의 구역을 사방으로 삼천삼백척(1km)으로하여 소나무의 벌목을 금하고 나무 가꾸기를 연례 행사화 하여 묘역을 가꾸었으며, 고을의 부사(府使) 허목(許穆)이 주지(州誌)의 서문에 기술하였고, 관동감사(關東監司) 정철(鄭澈)이 묘지의 도면을 그려서 왕께 올려 묘역을 수축할 것을 청하여 묘역을 가꾸어왔다는 기록이 있는 준경묘에 시신을 안치하게 된 전설을 소개하면 조선 개국 160여년전 장군공(將軍公) 휘(諱) 양무(陽茂)께서 돌아가시자 목조대왕(穆祖大王)께서는 선친의 묘 자리를 잡기 위해 선친의 시신 앞에 꿇어앉아 “아버님! 불효자는 머리를 풀고 아버님께 불효됨을 속죄함이 옳은 도리이오나 아버님께서 영원토록 명복을 누릴 유택을 마련하지 못하였기에 아버님의 시신 앞에 애도만을 하지 못하고 묘자리를 찾기 위해 불효를 저지를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한 뒤 묘자리를 찾아 하루 종일 산을 헤매다 산자락에 앉아 먼 산을 바라보고 상념에 잠겨 있는데 동자승을 거느린 도승이 지나가다 동자승이 “저기가 명당인데 무슨 걱정을 하느냐?”하자 도승이 “무슨 말을 함부로 하느냐?”고 꾸짖더니 이왕에 발설이 되었으니 그 명당의 자리 주인은 당신이나 그곳에 묘를 쓰려면 감당하기 어려운 조건이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것을 할 수 있을런지…… 하면서 말끝을 흐리자 목조대왕(穆祖大王)께서는 도승의 장삼자락을 붙들고 애원하자 도승이 하는 말이 “황금으로 관을 만들고 백 마리의 소를 잡아 그 피를 관에 칠해서 묘를 쓰면 백년 후에는 임금이 태어난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져 눈을 뜨고 보니 꿈이요 그 꿈이 하도 기이하여 골똘히 생각에 잠겨 집으로 돌아왔다.

입에 풀칠조차 하기 어려운 살림에 무슨 재주로 황금관을 만들고 소 백 마리는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답답한 마음에 탄식만을 되풀이하며 멍하니 먼산을 바라보는데 다 익은 밀짚(일설:귀리)이 바람에 나부끼며 황금물결을 이루고 손짓하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와 무거운 마음을 억누르고 선친의 시신 앞에서 한숨만 푹 쉬는데 부인이 무슨 걱정이 그렇게 깊어 그리 큰 한숨만 쉬느냐? 묻기에 가족들에게 묘 자리를 찾아 산을 헤매던 일이며 꿈 이야기를 하니 부인께서 친정집에 흰 소는 한 마리 있는…… 하는 순간 섬광처럼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이것이 천우신조로구나 생각하고 누런 밀짚으로 관을 만들고 흰소(白牛)를 잡아 그 피를 관에 발라 안장을 하였는데 그로부터 5대 손인 태조 고황제께서 등극하였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6. 전주리씨 운천군파 비금종중 세계도

 

시조1세

2세

3세

4세

5세

6세

7세

8세

리한(李翰)

자연(自延)

천상(天祥)

광희(光禧)

입전(立全)

긍휴(兢休)

염순(廉順)

승삭(承朔)


 

9세

10세

11세

12세

13세

14세

15세

16세

충경(充慶)

경영(景英)

충민(忠敏)

화(華)

진유(珍有)

궁진(宮進)

용부(勇夫)

린(璘)


 

17세

18세

19세

20세

21세

22세

23세

24세

양무(陽茂)

목조(穆祖)

익조(翼祖)

도조(度祖)

환조(桓祖)

태조(成桂)

태종(太宗)

세종(世宗)


 

25세

26세

27세

28세-1세

29세-2세

30세-3세

31세-4세

32세-5세

세조(世祖)

덕종(德宗)

성종(成宗)

파조-1세

2세

3세

4세

5세

운천군

인(寅)

이천군

수례(壽禮)

의령부정

부(傅)

우산부령

기(玘)

시응(時應)


 

33세

34세

35세

36세

37세

38세

39세

40세

41세

42세

43세

44

46세

47세

6세

7세

8세

9세

10세

11세

12세

13세

14세

15세

16세

17세

18세

19세


 

 

 

 

 

7. 운천군파(雲川君派) 항렬도(行列表)

 

※(표 이후가 항렬자(行列字)이며 그 이전은 이름임)

世(세)

28

29

30

31

32

33

34

35

36

37

子(자)

寅(인)

壽禮

(수례)

傅(부)

玘(기)

時膺

(시응)

本禎

(본정)

世文

(세문)

斗南

(두남)

富龍

(부용)

坤(곤)


世(세)

38

39

40

41

42

43

44

45

46

47

子(자)

尙黙

(상묵)

壽城

(수성)

○邦

(○방)

○永

(○영)

○薰

(○훈)

○九

(○구)

○雨

(○우)

○珩

(○형)

○成

(○성)

起○

(기○)

世(세)

48

49

50

51

52

53

54

55

56

57

子(자)

庸○

(용○)

宰○

(재○)

廷○

(정○)

揆○

(규○)

○洙

(○수)

炳○

(병○)

○烈

(○열)

基○

(기○)

鉉(현)

永(영)

世(세)

58

59

60

61

 

 

 

 

 

 

子(자)

種(종)

然(연)

圭(규)

鎔(용)

 

 

 

 

 

 


※ 전주이씨 돌림항렬은 대(代)는 세(世)에서 1을 뺀 값입니다.

 

 

 

 

 

 

36-9세  부용(富龍)

 

시조 한(翰)의 36세 손이고 성종대왕 왕자 운천군(雲川君)의 9세손으로 비금(飛禽))에 입도(入島)하신 두남(斗南)의 아들로 1725년 5월 16일 태어나 약관의 나이가 갓 지난 스물 두살(1746)에 무과에 급제하여 북방 수호의 공적을 인정받아 벼슬이 절충장군 중추부사 당상관에 이르렀으며 숙부인 상주이씨와 결혼하여 외동 아들 곤(坤)을 낳았다.

부용(富龍)은 자라면서 아버지로부터 왕손이면서 어떻게 하여 이처럼 외딴섬 비금에서 태어나게 되었으며 장성에 묻혀 계신 세문(世文)할아버지와 진도(珍島) 가사도(加沙島)에 묻혀 계신 본정(本禎) 증조할아버지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와 한양에 있는 일가친족을 찾고 본정(本禎)할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는 길은 오직 학문을 닦고 무예를 연마하여 과거에 급제해 나라에 공헌하는 길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히게 듣고 자랐다.

그러나 비금은 학문을 닦고 무예를 연마하기에는 입지적 조건이 맞지 않아 학문을 닦고 무예를 연마하기 위해서는 입지적 조건이 맞은 육지로 나가는 길밖에 없었다. 다행히 나주에 두학(斗學) 작은 아버지가 살고 계셨다. 그래서 학문을 닦고 무예를 연마하기 위하여 나주로 나가게 되었다. 그러나 나주에 살고 계신 작은 아버지가 워낙 가난한 살림살이라 학문을 닦고 무예를 연마하는데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그 어려움이란 낮에는 밭에 나가 일을 하여야 하고 밤이 되어야 학문을 닦고 무예를 연마하는 주경야독(晝耕夜讀)의 삼중고를 이겨내야 하는 여러 가지 악 조건을 극복하고 약관의 나이가 갓 지난 스물 두살에 무과에 급제하여 금의환향하였다.

무과에 급제하여 북방수호의 임무를 부여받아 함경도 지방의 북방 수호의 임무에 충실하면서 틈틈이 학문 수양에 힘써 성리학의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북방 수호의 임무를 마치고 귀향하는 길에 경기도 파주 광탄면 마장리에 들러 일가친족을 찾아뵙고 본정 할아버지가 전라도 섬에 유배된 내역을 소상히 설명드려 왕손이고 운천군의 후예임을 인정받고 항력과 촌수도 가리고 본정할아버지의 명예도 회복하셨다. 내려오는 길에 전주 덕진동에 있는 조경단(肇慶壇)에 들려 시조의 묘역에 참배하고 장성 북면에 묻혀 계신 세문(世文)할아버지 산소에 들려 그 동안 참배하지 못한 잘못에 대하여 용서를 빌고 산소 주위를 정비한 후 산직에게 산소 관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하여 상세히 지시하고 집에 돌아오셨다.

 

 

장성 북면에 묻혀계신 세문(世文)할아버지 산소에 참배를 마치고 이웃 황룡면에 있는 필암서원에서 하서(河西) 김인후(金仁厚)선생을 기리는 유생들과 교분을 쌓으며 후손이 조상에 갖추어야 할 도리와 예의 범절과 아름다운 덕성에 대하여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사람다운 도덕률 생활규범을 논하며 교분을 쌓고 많은 젊은 유생들을 문하생으로 하고 이웃 고을 담양에 이르렀다. 담양 소쇄원에서 송강(松江) 정철(鄭澈)선생을 기리는 유생들과 정철선생의 가사문학(歌辭文學)을 중심으로 선비로서 갖추어야 할 임금을 섬기는 기개와 적개 충절 부모님을 섬기는 효행심 형제간의 우애 웃어른을 공경하는 예의범절 이웃 간에 지켜야할 사회규약 장유유서(長幼有序) 등에 대하여 담론하고 장성에서처럼 많은 젊은 유생들을 문하생으로 하고 나주로 내려갔다.

나주 다시에 들려서는 무과 시험을 준비할 때 같이 무예를 연마했던 옛 벗들 동문수학(同門修學)하던 유생들과 만나 그 옛날 함께 뛰고 달리며 연마하던 무술이야기 가난한 생활에서도 굽히지 않고 공부했던 이야기 변방을 지키며 지내온 무용담들을 나누고 고향에 돌아왔다.

고향에 돌아와 보니 아버지의 직접적인 사랑과 교육을 받지는 못하였으나 아무런 힘없이 훌륭하게 잘 성장해준 외아들 곤(坤)이 대견스럽고 자랑스러웠으며 가장의 역할을 맡아서 가정을 잘 이끌어주고 아들을 잘 길러준 숙부인 상주이씨가 고마웠다. 늦게나마 그동안 못다한 자식에 대한 사랑과 교육에 아버지로서의 책임을 다했다.

왕손으로서 갖추어야 할 양식을 쌓기 위해 학문을 닦아야 하고 왕손으로서 손색이 없는 생활을 하는데는 넓은 식견이 필요하며 한양의 일가를 찾아 접하고 장성, 담양, 나주를 오가며 많은 유생들과 교분을 쌓게 하였으며 사람을 대할 때는 도량이 넓어야 함을 알도록 하였다.

이렇게 시간이 있을 때 마다 장성, 담양, 나주를 오가며 유생들과 교분을 쌓고 후학을 기른 보람이 있어 그가 죽자 문상객이 삼년상을 치르도록 끊이지 않고 줄을 이었으며 만장의 길이가 십수리에 이르렀다 한다.

정조대왕(正祖大王)은 그의 공적을 인정하고 절충장군(浙衝將軍) 중추부사(中樞府使)에 봉하는 교지를 1795년에 내렸으며 본정(本禎) 할아버지의 명예를 회복시켜주고 두남(斗南)아버지와 세문(世文) 할아버지에게 통정대부에 봉하는 교지를 내렸다.

 

 

 

 

37-10세  곤(坤)

 

시조 한(翰)의 37세 손이고 성종대왕왕자 운천군(雲川君)의 10세손으로 1762년 10월 13일 절충장군(折衝將軍) 중추부사(中樞府使) 부용(富龍)의 아들로 태어나 1795년 정조 대왕으로부터 통정대부 공조함의에 봉하는 교지를 받았으며 밀양 최씨와 결혼하여 1남 1녀를 낳았다.

곤(坤)은 아버지가 무과에 급제하여 함경도 지방에서 장수로 북방 수호에 임한 관계로 아버지의 직접적인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자랐으나 어머니 숙부인 상주 이씨의 엄한 가르침을 받고 아무런 손색없이 훌륭하게 자랐다. 어머니 상주 이씨는 곤(坤)에게 왕손의 후예이며 장수의 아들이란 자긍심을 심어 주었으며 올 곧은 선비 정신과 강인한 기상을 갖도록 심혈을 기우려 지도 하면서 자애로운 어머니의 사랑으로 교육하였다.

아버지의 직접적인 교육을 받고 자라지 못하였으나 부모님에 대한 효행심이나 웃어른을 섬기는 경로정신은 남 달랐으며 성리학에도 높은 경지에 이르러 훗날 아버지의 큰 사랑을 받게 되었다.

북방 수호의 임무를 마치고 낙향한 아버지께서 그동안 못해준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교육지도에 당신이 쌓은 학식과 풍부한 경험을 아들을 위해 심혈을 기우려 지도한 보람으로 그 누구와 겨뤄도 손색이 없게 높은 학식을 쌓게 되었다. 한양에 올라가 일가친족을 접견하고 종묘사직에 참배함에도 예의범절이나 충절을 표함에 아무런 손색이 없었다.

아버지를 따라서 장성 북면에 모셔진 세문(世文) 할아버지의 묘소에 참배하고 산직에게 묘소 관리와 나무 심기에 대해서도 상세히 타이르고 장성, 담양, 나주의 유생들과 만나 교분을 쌓는데 예의나 격식에 조그마한 손색이 없이 행세 하였다.

아버지의 녹봉과 선구자적 개척 정신으로 큰 가세를 형성 하였고 700여평의 집터에 아홉 칸 겹집의 큰 한옥을 지었는데 상양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집 지은 해가 가경(가경:嘉慶:중국연호)11년 이라고 기록 되었으니 1806년이다. 그 때 그 정도의 집을 지은 것으로 보아 얼마나 큰 가세였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곤(坤)할아버지는 아버지께서 보내주신 녹봉을 어떻게 하면 유용하게 더 효과적으로 관리할 것인가 생각하고 또 생각하여 재물이란 땅에 묻는 것이 최상이라는 생각으로 될 수 있으면 더 많은 논밭을 모으는데 힘썼다. 아버지의 녹봉으로 농토를 확장하면서 천성이 부지런하고 효행심이 지극하여 열심히 농토를 개간하여 아주 큰 가세를 형성하셨다. 효행심이 지극한 할아버지는 평생 아버지가 안 계신 집안에서 고생하시며 아들의 장래만을 생각하며 지극 정성으로 보살피신 상주 이씨의 고마움을 잊지 않고 어떻게 하면 편안히 모실 것인가 기쁘게 해 드릴 것인가 생각하여 어머니가 기쁘시겠다 생각되는 일은 그 일이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라도 기꺼이 하셨다. 이렇게 지극 정성으로 어머니를 모시는 일을 보고 마을 사람들이 한결같이 칭찬 하셨다.

부모에게 행하는 효행심 뿐만 아니라 웃 어른을 받드는 일이며 이웃에게 베푸는 일들이 조금치도 어긋남이 없으며 흩으러짐이 없어 존경의 대상이 되셨다. 이렇게 큰 가세를 형성하고 마을 사람들의 존경의 대상이 되는 데는

밀양 최씨는 후덕하여 마을 사람 누구에게든 끼니 때는 따뜻한 밥을 주어 먹게 하였으며 가난한 사람에게 아무런 댓가 없이 식량을 나누어 주어 배고픔을 달래게 하여 인심을 크게 얻어 그의 집에 크고 작은 일이 있을 때는 온 마을 사람들이 자기 집 일처럼 도와 그 많은 농삿일도 어느 집보다 먼저 마칠 수 있었다 한다. 음식 솜씨도 좋아서 지천에 널려있는 풀도 그의 솜씨가 닿으면 맛있는 음식이 되었다 한다.

밀양 최씨는 호쾌한 성품에 다정다감하며 어느 누구에게도 친밀감이 들게 하며 부드럽고 온후하여 친근감이 드는데다 인심이 후하여 자연히 정이 가게 하였으며 가난한 사람들의 배고픈 사정을 잘 알고 음식 인심이 후하여 더욱 큰 인심을 얻었다.

이처럼 좋은 음식 솜씨에 푸짐한 인심으로 그렇게 큰 집을 지으면서도 마을 사람들의 협조를 받아 아무런 어려움 없이 큰 돈 들이지 않고 지을 수 있었다 한다.

아버지께서 북방 수호의 임무를 마치고 낙향하여 한양의 일가를 찾아 교분을 쌓을 때 학문을 닦은 보람이 있어 왕손의 후예로서 손색이 없었으며 진도와 장성의 할아버지 산소도 산직답을 마련하여 산소 관리에 후손으로서의 직분을 다했다.

 

 

 

 

38-11세  상묵(尙黙)

 

시조 한(翰)의 38세손이고 성종대왕 왕자 운천군(雲川君)의 11세손으로 통정대부 공조 참의 곤(坤)과 정부인 밀양 최씨와의 사이에서 1789년 12월 3일 태어나 정부인 하동 정씨와의 사이에서 1남 1녀 정부인 함평이씨와의 사이에서 2남 1녀를 낳았다.

두남(斗南) 할아버지께서 비금에 입도(入島)하시어 삼형제의 아들을 낳으셨는데 부용(富龒)할아버지와 부선(富善)할아버지의 손이 독신으로 이어져 내려온데다 부휘(富輝)할아버지의 손은 끊어져 두남(斗南)할아버지께서 비금에 입도하신지도 4대째가 되어 경제적인 기반은 남 부럽지 않게 잡혀 풍족한 살림살이인데 일가친족이 달랑 두집밖에 되지 않아 일가친족 많은 것이 부러워 아들 딸 많이 나아 벌복한 집안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하여 3남 2녀를 낳았다.

기호(基昊) 기승(基昇) 두아들은 본래 터를 잡은 용소리에 눌러 앉아 살았는데 둘째 아들 기민(基旻)은 풍수지리를 쫓아 죽치로 이주하여 새로이 터를 잡아 살았는데 일가가 번창하게 되었으며 4대 후손인 수봉(秀鳳) 봉래(鳳㚓)가 개화기 일제 강점기 말에 면장을 지내게 되었다.

농경사회에서 척박한 땅에 자연적인 지력에 의존해 농사를 지으니 힘은 더 들고 소출은 조금 나며 더구나 휴경 기간을 두어야 하게 되므로 땅심을 높이는 방법이 필요하게 되었다. 지력을 높이는 방법은 비료를 주고 퇴비를 많이 넣어야 하는데 당시에는 퇴비에 의존해 농사를 짓는 시기였는데 퇴비를 증산하는 방법이 서툴러서 퇴비를 다량으로 만드는 방법이 필요하게 되었다.

상묵(尙黙)할아버지께서는 농사짓는 방법을 개선하여 어떻게 하면 편안한 방법으로 농사를 지으며 식량을 증산할 것인가 생각하여 식량 증산에 많은 공헌을 하셨다. 퇴비를 증산하는 방법으로는 농사의 부산물인 풀을 이용하였는데 퇴비를 만드는 방법은 보리짚과 풀을 가축의 축사에 넣어 가축의 분뇨와 섞어 짐승이 밟도록 하여 퇴비를 다량으로 만들게 하였으며 가축의 분뇨와 인분을 보리짚과 풀에 섞어서 만드는 방법도 병행하여 만들도록 하여 퇴비의 대량생산이 가능하게 했는데 만들어진 퇴비를 야적해 놓으면 비에 젖어 거름기가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마람으로 덮어서 빗물이 스며드는 것을 예방하게 하였다.

논농사를 짓는데는 수리시설이 필수 조건인데 비금은 입지적 조건이 강물도 흐르지 않고 수리시설이 전혀 되어 있지 않아서 논농사 짓기에 아주 불편한 지역으로 거의가 하늘에서 내리는 비만 바라보는 천수답으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개인이 소루지(작은 연못)를 파서 논농사를 짓고 있어서 수리시설이 절대 필요한 지역이었다. 그런데 다행이 용소리 마을이 형성된 곳에 6,000여평 되는 늪지가 있어서 조금만 사람의 힘이 가해지면 천혜의 수리안전답이 될 수 있는 조건인데 경비가 없고 인력이 부족하여 방치되고 있는 것을 안타까이 생각하여 여러 조건들을 상세히 기록하여 나주 관아에 진정서를 올렸다.

나주 관아로부터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실망하지 않고 지역내 살고 있는 민가호수와 사람의 수 경작면적 늪지의 규모 지역민의 잘 살아 보겠다고 열심히 살고 있는 모습들을 자세히 기록하여 최소한의 지원만 하여 주어도 성공적으로 사업을 마칠 수 있다고 설명하여 나주 관아로부터 재정적 지원과 소나무 묘목을 지원 받아 용방죽을 죽조하여 지역민이 소원하였던 수리안전답으로 만들고 늪지대의 준설과정에서 쌓인 모래밭에 소나무를 심어 사방사업까지 성공적으로 마치게 되었는데 그곳이 용방죽이고 용소망이다.

옛날에는 돌림병(전염병)이 자주 돌았는데 한 번 전염병이 퍼지면 그 기간이 오래 지속되었으며 피해가 커 큰 재앙으로 생각하였고 모두 무서워 하였다. 전염병이 돌면 의학적인 상식으로 처방하기에 앞서 미신적인 토속 신앙으로 생각하여 더욱 피해가 커서 돌림병이 퍼지면 마을은 쑥대밭이 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그래서 전염병을 예방하는 방법이 필요했는데 상대편 마을이 보이는 마을 어귀에 나무를 심어 우슬을 만들어 전염병이 옮기는 것을 예방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지금 과학적인 사고방식으로 생각하면 우슬이 하는 구실은 전염병이 돌 때 이웃마을에서 전염병을 옮기는 사람이 마을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는 초소같은 역할을 했던 곳이다.

이웃마을 도고리(道古里)라는 이웃 마을이 보이는 곳에 소나무를 심어 우슬을 만들었는데 이곳이 귀산망이요 마을 어귀에서 이웃마을 사람이 부락에 들어오는 것을 통제했던 곳이 드딜걸이다.

학문에도 조예가 깊었는데 아들들의 이름을 보면 기호(基昊) 기민(基旻) 기승(基昇)으로 호(昊) 승(昇)자가 모두 가로왈(曰)변에 4획으로 된 글자임을 알 수 있다.

 

 

39-12세  수성(壽城)

 

시조 한(翰)의 39세 손이고 성종대왕왕자 운천군(雲川君)의 12세 손으로 휘는 수성(壽城) 자(字)는 기호(基昊), 호는 하은(霞隱)으로 아버지 가선대부 한성부윤 상묵(尙黙)과 어머니 정부인 하동정씨와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나 정부인 창녕성씨와 결혼하여 3남 4녀를 낳았다. 장성하여 두 동생(기민:基旻,기승:基昇)과 함께 집안의 여러 일과 조상의 묘역을 가꾸는 일들을 주도적으로 하면서 후학을 기르고 여러 고을의 유생들과도 교분을 쌓았다.

고을의 풍헌(오늘의 면장)이 왕손의 후예에게 베풀어야 할 예우를 몰라서 연호잡역에 동원하자 왕손은 연호작업에 동원 할 수 없는 것이 국법이라고 항의 하였으나 듣지 않자 기호(基昊) 기민(基旻) 기승(基昇) 삼형제는 연명으로 종친부와 전주감영에 탄원서를 제출하여 종친부로부터 왕손의 후예에게는 여하한 경우에도 왕손에 걸맞은 예우를 하여야 하며 매사에 최상의 예우로 왕손으로서의 위상에 손색이 없도록 대접하는 것은 물론 왕손의 후예에게는 연호작역을 시켜서는 안된다는 종친부의 순영문이 비금풍헌에게 내려졌다.

종친부에서는 전주감영에도 운천군의 후예들이 비금도(飛禽島)에 유락되어 살고 있는데 그곳의 관리들이 우매하여 왕손의 후예에게는 연호잡역을 시킬 수 없다는 국법을 모르고 연호작역을 시키고 있으니 전주감영에 잡아다 엄중 문책하고 종친부에 보고하라는 명을 내리는 완문이 내려졌다.

전주감영에서는 그 섬에 살고 있는 이기호(李基昊) 이기민(李基旻) 이기승(李基昇)등이 올린 탄원서를 보니 그들은 왕손의 후예로서 비금도에 유락되어 살고 있으나 그 섬의 관리들이 무지하여 왕손의 후예에게는 연호작역을 시킬 수 없다는 국법을 어기고 있으니 잡아다 엄중 문책해 달라는 탄원서를 접하고 그대들을 전주감영에 잡아다 엄중 문책할 것이나 앞으로 잘 할 것으로 여기고 이번만은 용서하니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라고 명하는 전주 감사의 전령이 비금풍헌에게 내려갔다.

수성(壽城)할아버지는 기민(基旻) 기승(基昇) 두동생과 함께 조상의 묘역을 가꾸는 일에도 앞장서 비금에 있는 산소는 말할 것 없고 진도 가사도 본정(本禎)할아버지 산소와 장성 북면에 있는 세문(世文)할아버지 산소에 상석과 표석을 세워 묘역을 정비하고 산직답을 마련하여 산직에게 산소 관리를 잘 하도록 자손으로서의 본분을 다 하였다.

장성 ‘고산서원’의 담대헌에서 당대의 조선 최고 학자인 노사(蘆唦) 기정진(奇正鎭)선생과 우주의 생성원리는 이(理)와 기(氣)로 조성되어 있는데 우리 사람의 육신과 정신이 일치된 것으로 이(理)와 기(氣)는 각각 개체로 생각해야 한다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 이(理)와 기(氣)는 분리해 생각할 수 없고 합일해 동일시 해야 한다는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을 논하고 우주의 생성원리가 우리 인간의 음양(陰陽)의 이치에 일치한 것으로 이와 기가 강생하여 생성되느냐? 상극하여 생성되느냐?에 따라 심성이 다르게 나타나는데 의견을 같이하고 음양오행이 심성의 형성에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논하여 훌륭한 학자란 극찬을 받으셨는데 참고로 노사(蘆唦) 기정진(奇正鎭)선생을 소개하면 ’장안만목이 불여장성일목(長安萬目不如長城一目)?즉 서울 장안의 모든 선비가 전라도 장성에 사는 애꾸눈 기정진 한사람만 못하다는 일화를 남긴 분인데 그 일화의 요지는 조선말기 조선의 상주국 행세를 한 중국의 사신들은 괴상한 글귀를 제시하고 기한을 두어 풀게한 다음 만약 기한내에 풀지 못하면 글을 모르는 민족이라고 업신여기고 거들먹 거렸으며 심지어 벌칙까지 내렸다 한다. 당시 중국사신이 제시한 글귀는 ‘용단호장(龍短虎長)’:용은 짧고 호랑이는 긴 것은? 조정의 신하는 물론 서울 장안의 내노라하는 선비들이 풀지 못하여 임금님과 신하들의 걱정이 태산 같았다. 그때 임금님은 전라도 장성에 학문이 높은 선비가 있다하니 그에게 사람을 보내 풀게금 했다. 전라도 장성의 노사(蘆唦) 기정진(奇正鎭)선생은 ‘용단호장(龍短虎長)’이란 ‘화원서방(畫圓書方)’ 이라 푼다. 즉, 용은 짧고 호랑이는 긴 것은 ‘그림으로 그리면 둥글고 글씨로 쓰면 모가진다.’ 우리나라 동해에는 고기(魚)가 있는데 무두무미(無頭無尾)요 우무척골(又無尺骨)이라 고기(魚)가 머리와 꼬리가 없으니 밭전(田)자요 또 내리긋는 획을 없애니 날일(日)자라 즉 해(日)다 왜? 해인가?

해(日)가 진(厎:용)의 방향에서 떠서 진(厎:용)의 방향으로 지는 겨울해는 짧고 인( 호랑이)의 방향에서 떠서 인(호랑이)의 방향으로 지는 여름해는 길기 때문이다. 답을 받아본 중국의 사신들은 조선에도 글을 아는 선비가 있다고 탄복했으며 수모를 면하게 된 임금님은 장안의 모든 선비가 전라도 장성에 사는 애꾸눈 기정진 한 사람만 못 하구나 했다 한다.

진도 가사도 본정(本禎)할아버지 묘역을 정비하고 오시는 길에 해남에서 윤두수(尹頭壽)의 후손들 그리고 그 곳의 유생들과 교분을 맺고 할아버지께서 집필하신 하은집(霞隱集)의 내용을 중심으로 인간사회에서 사람으로서 갖추어야 할 군신간의 예절 자손으로서 조상을 받드는 마음가짐 부모님을 섬기는 자세 동기간의 우애 웃어른을 받드는 공경심에 대하여 논 하셨다.

수성(壽城)할아버지는 주로 장성 해남에 많은 후학을 기르며 효와 애경을 중심 학문으로 강의 하셨고 300여년 이어져 온 이기(理氣)의 논쟁을 정립하여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으로 정립하여 이(理)와 기(氣)는 각기 개체로 우리 인간의 심성에 육신과 정신세계에 영향을 미친다고 하였으며 500여년 이어온 유교의 벽을 허물었고 이렇게 정신세계가 변천 한다면 임금님의 자리를 신하가 빼앗고 지아비의 자리를 지어미가 빼앗으며 이치의 순리를 오기가 빼앗을 것이라 예견하셨다.

이렇게 학문에 정진하시며 후학을 기르는 일에 열심히 하시면서 여러 이웃 고을의 유생들과 교분을 쌓으시면서 조상의 묘역을 가꾸는 일에도 심혈을 기우려 당두리 선산을 비롯하여 장성 세문 할아버지 묘소와 진도 가사도 본정 할아버지 묘소의 표석과 상석을 세우고 산직답을 마련하고 산직을 두어 산소 관리에 소홀함이 없도록 하였다. 수성(壽城)할아버지는 이웃 고을에까지 이름이 알려진 학자요 문장가로 하은집(霞隱集)을 남기셨는데 이웃 고을 해남분이 찾아와 책으로 발간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책으로 발간하기 위해 위탁한 것이 분실하게 되었다. 문집을 되찾기 위해 수차례 찾아 갔으나 문집을 가져가신 분이 돌아 가셨고 그 후손이 문집에 관해 들은 바 없다고 하여 분실하게 되었는데 후손인 우리로선 애석한 일이다.

할아버지에게서 전해들은 문집의 내용을 소개하면 효와 선행을 강조한 덕목으로 인간과 만물은 이(理)와 기(氣)가 조화를 이루어야 하고 사회의 혼란스러운 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것을 제시하기 보다는 옛것을 제대로 전하겠다는 생각이 중요함을 일깨워야 하고 사람은 반드시 지켜야 할 길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성(性)즉 윤리의 기준으로 아무리 지체 높은 사람이라도 지켜야 할 기준을 따라야 한다는 내용을 강조한 글들로 짜여 졌다고 한다. 문장의 한 구절을 소개하면 “이득전지 난득형제 경조목덕(利得田地 難得兄弟 敬祖睦德)라 해서 재물과 영화는 얻기 쉬우나 형제는 얻기 어려운 것이니 형제를 소중해 여기고 웃어른을 공경하여 자손들끼리는 화목하라는 교훈이어서 오래도록 문중의 가훈으로 전해 내려왔다.

 

 

40-13세  현은(鉉听)

 

시조 한(翰)의 40세 손이고 성종대왕왕자 운천군(雲川君)의 13세 손으로 휘(諱)은 현은(鉉听)자(字)는 명욱(明旭)호(號)는 매사(梅史)로 아버지 가선대부 수성(壽城)과 어머니 정부인 창녕성씨 사이에서 3남 4녀중 장남으로 1848년 7월 13일 태어났다.

수성(壽城) 아버지에게서 학문을 전수받아 유학자에 버금가는 학식을 쌓았으며 학덕이 높아 사리에 밝고 말과 행실이 이치에 어긋남이 없어 고을에서 존경을 받았다. 모든 일에서 바르고 옳은 일의 행실은 나 자신부터 우리집부터 실행해야 한다는 수신제가(修身齊家)를 몸소 실행하는 본을 보여 고을 주민의 존경을 받았다. 고을 사람들은 자연히 크고 작은 분쟁이 생기면 찾아와서 옳고 그름을 가려 달라고 의존하였다. 분쟁이 생기면 잘 잘못을 가려 승소한 것도 중요하지만 이웃간의 화목이 더욱 값진 것이란 것을 설득하여 좋은 이웃이 되도록 유도하여 화목한 사회 건설에 공헌하여 고을 사람들로부터 더욱 존경을 받았다.

비금에서는 우리 집안이 가장 벌족한 것처럼 소문이 났는데 사실은 다른 성씨들이 훨씬 더 벌족하다. 그런데 우리 집안이 더 벌족한 것처럼 소문이 난 것은 두남(斗南)할아버지께서 비금에 입도(入島)하신지도 5대가 지났으나 겨우 일곱 집에 불가하던 집안이 현은(鉉听)할아버지께서 6남 1녀를 낳아 건강하게 기르신 데다 현화(鉉和)할아버지 내외분이 어린 아들(권일)을 남긴채 요절 하였는데 현은(鉉听)할아버지께서는 어린 조카인 권일을 데려다 친 자식 이상 아무런 험 없이 길러 결혼을 시켜 새집을 지어서 분가를 시켰는데 훗날 새집 할아버지로 불리게 됐다. 이렇게 잘 기른 6형제와 조카가 4형제씩의 아들들을 낳았는가 하면 손자 연령대의 증손자가 태어나 갑자기 40여호의 큰 가문으로 번창 한데다 아버지가 남기신 하은집(霞慇集)의 한 구절인 “이득전지 난득형제 경조목덕”(利得田地難得兄弟敬祖睦德) 재물과 영화는 얻기 쉬우나 형제는 얻기 어려운 것이니 형제를 소중히 여기고 웃어른을 공경하여 자손들끼리 화목하라는 아버지의 교육철학을 자손들에게 강조하여 지도한 보람으로 자손들이 크고 작은 일에 하나로 뭉쳐 단결력을 과시한데다 인재들이 많아서 다른 집안들 보다 벌족한 것으로 소문이 나게 되었다.

 

 

41-14세  권유(權裕)

 

시조 한(翰)의 41세 손이고 성종왕자 운천군(雲川君)의 14세 손으로 휘(諱)는 만영(萬永) 자(字)는 권유(權裕) 호(號)는 일심(日心)으로 아버지 통정대부 중추관 현은(鉉听)과 어머니 숙부인 밀양박씨 박정화의 딸 사이에서 6남 1녀 중 막내아들로 1886년 1월 17일 태어나 도초면 우이도(牛耳島)태생 상원김씨 김덕유의 딸 춘양과 결혼하여 4남 2녀를 낳았다.

천성이 강직하고 옳고 그른 것이 분명하였으며 인후박애(仁厚博愛)하여 모든 사람을 따뜻한 정으로 대하였으며 어려서부터 부지런하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학문에도 뛰어나 청경우독(晴耕雨讀)으로 성리학에도 높은 경지에 올랐다. 가난을 부끄럽게 생각지 않고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선비정신을 즐겼으며 사람의 본분을 효(孝),경(敬),예(禮)에 두고 부모님을 지극정성으로 모시어 대성학원으로부터 효자상을 받았다. 윗사람을 공경하며 벗을 사귀는 등 가정의 전통적 기강을 세우는 일에도 선도적 역할을 하셨으며, 사회의 건전한 조직을 위한 규범인 향약(鄕約)을 제정하여 실행 하도록 하였는데 일제의 강압과 수탈로부터 농민을 보호하고 악덕 지주들의 수탈을 막아내고 우리만이 갖고 있는 미풍양속을 계승발전 시키며 자유분방한 신자유주의의 폐습으로부터 우리의 청년들을 보호하겠다는 생각으로 향약을 제정하여 실행하였다.

씨족의 성격이 강한 사회여서 각 씨족의 좌장을 고문으로 하고 각 씨족에서 덕망이 있고 추진력이 강한 사람으로 향감과 관찰력으로 하였으며 신분제도를 타파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으므로 신분에 관계없이 전 리민이 참여하여 책임감을 갖고 참가하도록 독려하고 권장했다.

실천강령으론 부모님을 섬기는데는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다 하는 것은 물론 부모님이 즐거워하는 일을 할 것이며 형제간은 자기 자신을 생각하는 것 보다 더한 우애를 다해야 하고 윗사람을 섬기는데는 자기의 부모님을 모시듯 극진히 대하여야 하고 이웃간에는 친 동기간을 대하듯 사랑과 인정으로 서로 의지하고 도와 아름답고 밝은 사회가 되도록 서로 힘써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좋은 일은 찾아내서 서로 권장하고 잘못된 일은 다시 되풀이 하지 않도록 바로 잡아주며 예속을 권장하고 어려운 일은 서로 도와 해결하는 미풍양속의 계승 발전에 앞장서 존경의 대상이셨다.

농경사회에서 협동하며 소득을 증대하는데 꼭 필요한 두레를 조직하고 운영하는데 필요한 조직과 운영의 제반 규약을 제정 실행하였는데 지역 사회의 발전과 공헌한 사항을 살펴보면 두레의 수와 규모는 마을의 규모와 부락 형성의 지형적 조건을 감안하여 정하고 두레 가입은 의무적이었으나 노약자 부녀자 연소자는 제외 하였으나 과부나 병약자도 공동노동의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하여 농사짓는데 애로가 없도록 배려했다.

조직원의 능력과 역량에 알맞은 역할 분담을 주어 운영의 묘를 기 하면서 능률의 극대화에 힘쓴 것도 경영의 묘라 생각된다.

두레 조직원의 하는 일은 농번기철의 모내기, 김매기, 추수 같은 일은 공동작업으로 하고 농한기에는 퇴비증산, 새끼꼬기, 마람엮기, 각종 농기구 제작 등의 짚공예 만들기와 산림가꾸기, 밭농사를 집단으로 하면서 일의 능률을 올리고 농사일과 관혼상제시 상부상조의 미풍양속을 발전시키는데 다 같이 힘을 모아 지역의 발전과 농가소득 증대에 공헌하여 지역민의 존경을 받으셨다.

후진들의 교육에도 남다른 애정을 갖고 사재를 두어 비금동 초등학교를 마을로 유치하여 교육 발전에도 크게 공헌하였으며 지역민의 전통예절의 계승발전에 선도적 역할을 하여 지역민의 존경을 받으셨다.

자손들의 교육에도 남다른 애정을 쏟아 첫째 아들 향순은 성리학에 밝아 아무리 지체가 높은 사람이라도 반드시 지켜야 할 기준이 있는데 그 기준이 되는 규범을 어기지 않고 실행하여 하늘을 향해 한 점 부끄럼이 없는 삶을 살았으며 사람이 살다보면 군자와 함께하는 경우도 있지만 소인배와도 함께 하는 경우가 있는데 소인배의 간사한 말은 달콤하게 들리지만 독이 되는 것이니 멀리하고 군자의 언행은 귀에 거슬리는 듯 하지만 약이 되는 것이니 군자의 언행에서 생활의 지혜를 찾으라고 자녀들에게 가르치셨다. 둘째 아들인 향복은 선출직 지방의원에 두 번 씩이나 당선되어 지역발전에 공헌 하였으며, 막내 아들 정인은 교장으로 봉직하여 국가교육에 필요한 인재양성에 헌신하였다. 그런 조상들의 덕으로 자손들 또한 각계각처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첫째 아들 향순의 자녀 중 맹송과 춘임은 초등학교 교장으로 봉직하였고, 둘째 아들 향복의 자녀 중 큰 아들 후련과 딸 마미는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둘째 아들 창후는 농학박사로 고려대학교 농과대학 교수, 자연대학원 원장을 역임하였다. 막내 아들 정인의 큰 아들 배만은 현대중공업 계열사인 한라조선의(목포)대표이사로 봉직하는 등 사회 각처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인물이 많음을 권유(權裕) 할아버지의 음덕이 자손만대에 미치고 있기 때문이라고 칭송한다.

 

 

 

 

 

 

 

* 운천군파 비금종중 종친께서는 상기 내용중 틀린 부분이 있다면 댓글로 알려주시면

  바로 수정토록 하겠읍니다....

 

** 운천군 이인(李忄寅)의 이름 인(心+寅)자는 마음심(心) 변에 寅자 이지만, 컴퓨터에는 그런 한자가 없어서 일반적으로 이인(李寅)으로 쓰지만, 이인(李 忄寅) 또는 인( 小寅 ) 이렇게 표기해야 한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