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이씨 운천군파 (비금소종회)

성종의 자녀들

블랙썬 2014. 5. 22. 17:36

 

성종의 자녀들......

 

 

<적장남> 연산군 - 폐비(제헌왕후) 윤씨 소생

 

<적2남> 중종 - 정현왕후 윤씨 소생

 

<적장녀> 신숙공주(愼淑公主)[1481 ~ ?]

일찍 사망.

 

<서장남> 계성군 순(桂城君恂)[1478 ∼1504] - 숙의 하씨 소생

자는 수견(壽堅). 성품이 거만하고 포악했으며, 시중잡배들과 어울려 다니며 나쁜 짓을 일삼았다. 심지어 그의 종들이 유생들을 함부로 구타하고, 형조의 하인들을 집안에 가두기도 했다. 이일로 조정이 시끄러웠으나 연산군이 그를 총애하여 벌주지 않았다. 계성군은 기생들과 자주 어울렸는데, 궁궐에 머물던 기생(흥청)들과도 간통하였다.

계성군이 종실의 기강을 잡는 종부의 제조였을 때 그의 옳지 못한 행실이 문제가 되어 여러 번 탄핵당했으나, 연산군은 오히려 계성군을 비호하였다.

부인은 원주 원씨 첨정(僉正) 원치의 딸인 안성군부인(安城郡夫人)으로 소생은 없다. 첩에게서 딸 1명을 얻었다.

월산대군(덕종의 장남, 성종의 형)의 서자 덕풍군의 아들 계림군 유로 후사를 이었다.

 

<서2남> 안양군 항(安陽君 心行)[1480~ 1504] - 귀인 정씨 소생 

자는 성의(聖儀), 호는 만송(晩松).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사건에 어머니인 귀인 정씨가 가담하였기 때문에 연산군의 미움을 받았다. 1504년(연산군 10)에 제천에 안치되고 가재는 적몰(籍沒)되었고 노비전토사채(奴婢田土私債)는 추쇄(推刷)되고 처와 강제로 이혼당했으며 동생 봉안군 봉과 함께 사사되어 아무데나 묻혔다.중종이 즉위하면서 관작이 신원되었고, 무덤도 다시 조성되었다. 시호는 공회(恭懷)이다.

부인은 능성 구씨 능천군(綾川君) 구수영(具壽永)의 딸인 면천군부인(沔川郡夫人)으로 딸 1명을 두었고, 3명의 첩에게서 1남 2녀를 얻었다.

 

<서3남> 완원군 수(完原君 心遂)[1480 ~ 1509] - 숙의 홍씨 소생

자는 득지(得之). 1489년(성종 20) 10세 때 완원군으로 봉군되었는데 종친 품계는 정1품 흥록대부이다. 1492년(성종 23) 전주 최씨와 혼인했으나, 최씨가 시집온 지 9년만에 죽자 1502년(연산군 8) 양천 허씨와 다시 혼인을 했다.

연산군은 완원군과 그의 형제들이 자신에 대한 나쁜 소문을 낸다고 의심하여 숙의 홍씨 소생들을 미워했다. 실제로 연산군이 어머니 폐비 윤씨의 원수를 갚는다고 숙의 정씨와 엄씨를 처참하게 죽일 때, 궁녀 나읍덕(羅邑德) · 칠금(七今) 등이 완원군의 사저로 찾아가 궁궐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의 참황을 전했다. 이에 연산군은 완원군의 여종인 옥금(玉今) · 존이(存伊), 그 어미인 존비(存非)가 궁인과 결탁하여 `궁중의 임금에 관한 일'을 누설하였다는 죄로 궁인 나읍덕과 여종 존비 · 존이 등을 즉시 병조 군기시 앞에서 참형에 처하여 저자에 효수였고, 완원군은 104년(연산군 10)에 충청도 부여현으로 유배되었다. 이후 중종이 즉위하여 유배지에서 풀려났다. 시호는 소도(昭悼)이다.

첫번째 부인은 전주 최씨 하림의 딸인 면천군부인(沔川郡夫人)으로 소생이 없이 죽었으며, 두번째 부인은 양천 허씨 적의 딸인 정선군부인(旌善郡夫人)으로 2남 2녀를 두었다.  

 

<서4남> 회산군 염(檜山君恬)[1481 ∼ 1512] - 숙의 홍씨 소생

호는 보익당(輔翼堂). 회산군은 욕심이 많고 재물을 탐했으며, 종들을 시켜 시장 상권을 강제로 장악하는 사태를 일으켜 조정의 탄핵을 받았다. 연산군은 회산군의 형제들이 궁궐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바깥에 알렸다 하여 그의 집을 빼앗아다 흥청의 숙소로 사용했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부인은 죽산 안씨 방언의 딸인 영원군부인으로 딸 1명을 두었다. 견성군의 아들 계산군 수계로 후사를 이었다.

 

<서5남> 봉안군 봉(鳳安君熢)[1482 ~ 1505] - 귀인 정씨 소생

자는 성지(誠之) 또는 풍애(楓崖). 1504년(연산군 10) 봉안군의 어머니 귀인 정씨가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의 폐출 사건에 가담하였기 때문에 봉안군을 옥에 가두었다가 이천(伊川)에 귀양보냈다. 1505년 형 안양군 항과 함께 사사되었다. 봉안군에게는 첩이 여럿 있었는데, 연산군은 그 첩들을 모두 종실에게 나누어 주었다. 중종반정 뒤 관작이 복구되었다. 중종반정 후 복권이 되어 시호가 공회(恭檜)라고 내려졌으나, 1872년(고종 9)에 시호가 정민(貞愍)으로 내려졌다.

부인은 평양 조씨 기의 딸인 의춘군부인으로 아들 1명을 얻었다. 첩에게서는 딸 1명을 얻었다.

 

<서6남> 견성군 돈(甄城君惇)[1482 ∼1507] - 숙의 홍씨 소생

자는 근지(謹之). 1491년(성종 22) 견성군에 봉해졌다. 1503년(연산군 9)에 자신이 다니던 절간의 부역을 중지시키기 위해 종을 시켜 당상과 낭청의 수결(手決)을 위조한 사건으로 종부시에서 국문을 받았다. 아지만 연산군은 그를 총애하여 벌을 내리지 않았다. 연산군은 또 그를 종부시의 규찰감으로 삼기도 했다.

중종 즉위 후 1507년 정국원종공신(靖國原從功臣) 전산군(全山君) 이과(李顆)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이들의 추대를 받았다 하여 간성군에 유배되고, 이어 사사되었다. 그뒤 역모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인정되어 이듬해 신원되었다. 시호는 경민(景愍)이다.

부인은 평산 신씨 우호의 딸인 영양군부인(永陽郡夫人)으로 2남 1녀를 얻었다.

 

<서7남> 익양군 회(益陽君懷)[1488 ~ 1552] - 숙의 홍씨 소생

자는 순지(順之). 1496년(연산군 2) 익양군에 봉하여지고, 연산군이 살육을 자행하면서 형제를 더욱 미워하자 그는 두문불출하고 거짓으로 우매한 체 행동하여 화를 면하였다.

1505년(연산군 11)에 집안에 도둑이 들자 사사로이 동부승지에게 직접 알려 관부의 위계를 어기는 죄를 범하여 동부승지와 도승지를 국문당하게 했다.1506년에는 중종반정의 원종공신이 되어 문소전(文昭殿)·연은전(延恩殿)·종부시(宗簿寺) 등의 제조(提調)와 종친부의 유사당상(有司堂上)을 겸임하였다. 시호는 순평(順平)이다.

1510년(중종 5)에 모친상을 당하자 3년 동안 산소에 여막을 짓고 집상의 예절을 다하였다. 상복을 벗자 복직해서 문소전(文昭殿) · 연은전(延恩殿) · 종부시(宗簿寺) · 사옹원(司甕院) 도제도(都提調)와 종친부의 유사 당상관을 지냈다. 또 자손이 제일 번창하였다 하여 나라의 혼인이 있을 때에는 반드시 익양군의 내외에게 명하여 예를 주관하게 했다.부인은 영일 정씨 문창의 딸로 4남 3녀를 얻었고, 첩에게서 아들 2명을 얻었다.

 

<서8남> 이성군 관(利城君慣)[1489 ~ 1552] - 숙용 심씨 소생

자는 공숙(公肅). 1497년(연산군 3)에 이성군에 봉해졌다. 사람됨이 총명하여 맡은 일을 잘 처리하였으므로 왕자로서는 파격적으로 조정의 일을 처리하는 직책에 임용되었다. 문소전(文昭殿)·연은전(延恩殿)·사옹원(司饔院) 등의 도제조를 역임하였다.1524년(중종 19)에 거만하게 굴다가 조정의 탄핵을 받고 체직되었으며, 1529년(중종 24)에는 종들을 시켜 훈련원 관원들을 구타했다가 다시 한번 6개월간 정직 처분을 당했다.1545년(인종 1)선왕인 중종의 어용(御容)을 추화(追畵)할 때는 도제조가 되어 그림을 그렸고, 왕이 종친의 집에 갔을 때 호종하면서 안양(安養)할 것을 진언하였다.그해 명종이 즉위할 때는 대윤인 윤임(尹任)을 탄핵하여 명종을 보위에 오르게 하는 데 공이 컸으므로 위사공신(衛社功臣)1등에 책록되었다. 시호는 장평(章平)이다.

첫번째 부인은 남평 문씨 간의 딸인 곤산군부인으로 아들 3명을 얻었고, 두번째 부인은 안동 권씨 수종의 딸인 풍산군부인이다. 2명의 첩에게서는 2남 1녀를 얻었다.

 

<서9남> 경명군 침(景明君?)[1489 ~ 1552] - 숙의 홍씨 소생

자는 성지(誠之). 단아하고 검소한 성품과 뛰어난 학문으로 명망이 높았다.

1497년(연산군 3)에 경명군의 봉호를 받았으며, 1506년(중종 1)에 정국원종훈(靖國原從勳)에 책록되고 종친부 · 종부시 · 사옹원의 도제조(都提調)를 맡고 또 문소전도 관장하였다.

1519년 7월(중종 14)에 조정에서 표문을 옮길 때에 백관이 다 말에서 내리는데 홀로 말에서 내리지 않고 달렸다 하여 국문을 당했다. 또, 1521년(중종 16) 안처겸(安處謙) 등이 남곤(南袞)·심정(沈貞)의 제거를 도모하다가 오히려 남곤·심정의 반격을 받아 역모를 획책하였다는 죄명으로 주살될 때 안처겸 등이 경명군 추대를 운위하였다 하여 이에 연루되어 탄핵받았다. 그러나 경명군의 무고함을 확신하는 중종의 비호로 화를 입지 않았다

1524년(중종 19)에는 방자한 행동을 일삼는다 하여 종부시에서 체직되었다. 시호는 정민(貞敏)이다.

부인은 파평 윤씨 첩의 딸인 강양군부인(江陽郡夫人)으로 2남 2녀를 두었다.

 

<서10남> 전성군 변(全城君 心卞)[1490 ~ 1505] - 귀인 권씨 소생

자는 언보(彦甫). 1498년(연산군 4) 전성군에 봉해졌고, 1503년 안동 권씨 건의 딸과 혼인했다.

전성군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천성이 온후하며 효행과 학문이 남달리 뛰어나 세인이 추앙하였는데 16세에 후사도 보지 못하고 죽었다. 시호는 숙민(肅愍)이다.

부인은 안동 권씨 건의 딸로 소생은 없다. 성종의 서7남 익양군의 아들 광천군으로 후사를 이었다.

 

<서11남> 무산군 종(茂山君悰)[1490 ∼ 1525] - 명빈 김씨 소생

자는 낙지(樂之). 어려서는 학업에 정진하여 학문은 물론 서예에도 뛰어나 당세의 명필로 알려졌다. 또한 왕자로서 효행이 지극하였고 형제간에도 우애와 청렴으로 수신하였다. 연산군 때 무오사화 · 갑자사화로 사림파가 대량으로 숙청당하고 음요학정(淫謠虐政)으로 국사가 날로 어지러워지는 것을 종친들과 탄식하며 대책을 논의하던 중 어머니 안동김씨가 신변의 위험함을 듣고 친정인 안동 춘양으로 피신하도록 하여 위기를 모면하였다. 그 후 중종반정에 의해 폐정개혁을 일으켜 새로운 기풍의 시대에 장동 옛집(현 서대문 로터리)으로 환가하였다. 시호는 효정(孝貞)이다.

부인은 평산 신씨는 수의 딸로 8남 2녀를 얻었다. 4명의 첩에게서는 2남 2녀를 얻었다.

 

<서12남> 영산군 전(寧山君?)[1490∼1538] - 숙용 심씨 소생

자는 공근(公謹). 명민하고 학식이 깊어 왕자시절부터 중종에게 총애를 받았다. 중종이 잠저에 있을 때 연산군이 사냥을 핑계삼아 가해하고자 할 때 공은 충성과 기지와 용기로써 화를 면하였다.

1506년(중종 1) 가을, 형인 회산군(檜山君)과 종사의 위급함을 걱정하고 몇몇 중신들과 종사 회복을 위한 은밀한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연산군이 성 밖으로 사냥갔다 환궁할 때, 영산군은 백관을 거느리고 정현왕후(성종의 비)의 명임을 일컬어 성문을 가로막고 연산군을 들이지 않았다. 결국 연산군은 교동으로 물러나게 되었고 이어 중종이 보위에 오르니 곧 중종반정이다.1523년(중종 18) 의정부의 관노인 정막개(鄭莫介)가 “박영문(朴永文) 등이 영산군을 추대하여 반란을 꾀한다.”는 밀고를 하여 조의가 분분했는데 이에 연루되어 결국 영산군은 1523년 9월에 황해도 배천 땅으로 귀양갔다.

1527년(중종 22) 정언(正言) 이홍간(李弘幹)은 세종이 양녕대군을 방면한 고사를 진언하자, 평소 그를 신뢰하던 중종은 “영산군의 해를 꿰뚫는 충성은 내가 익히 아는 바이니라.” 하며 1527년 11월에 방면시켰다.

첫번째 부인은 청송 심씨 찬성(贊成) 심순로(沈順路)의 딸로 딸 2명을 낳았고, 두번째 부인은 경주 정씨  찬성 정홍선(鄭弘先)의 딸이며  세번째 부인은 주부(主簿) 황징(黃徵)의 딸이다.

3명의 첩에게서는 2남 3녀를 얻었다.

 

 <서13남> 운천군 인(雲川君 心寅)[1490 ~ 1524] - 숙의 홍씨 소생

1498년 운천군에 봉해졌다. 시호는 소회(昭懷)이다. 부인은 안동 권씨 인손의 딸로 딸 4명을 얻었다. 형인 완원군의 아들 이천군 수례로 후사를 이었다.

 

<서14남> 양원군 희(楊原君憘)[1492 ∼ 1551] - 숙의 홍씨 소생

자는 흔보(欣甫). 1535년(중종 30) 1월에 본가에 다녀가는 나인을 업간한 죄로 국문을 당하였다. 시호는 정혜(貞惠)이다.

첫번째 부인은 평양 조씨 경의 딸인 문천군부인(文川郡夫人)으로 아들 1명을 얻었고, 두번째 부인은 문화 류씨 우찬성(右贊成) 류종손(終孫)의 딸인 양근군부인(楊根郡夫人)으로 소생은 없다. 여러 첩들에게서 3남 8녀를 얻었다.

 

<서장녀> 혜숙옹주(惠淑翁主) - 숙의 홍씨 소생

1490년(성종 21) 고령 신씨 종호의 아들인 고원위(高原尉) 항에게 출가하였으나 소생은 없다.

 

<서2녀> 휘숙공주(徽淑翁主) - 숙의 김씨 소생

1491년(성종 22) 풍천 임씨 사홍의 아들인  풍원위(豊原尉) 숭재에세 출가하여 딸 3명을 낳았다.

휘숙옹주는 연산군으로부터 여러 차례 땅과 노비를 받았는데, 이는 휘숙옹주가 연산군과 간통한 것에 대한 일종의 보답이었다. 연산군은 종실의 여자들과도 간통을 했는데, 휘숙옹주 역시 그 중 하나였다.

 

<서3녀> 공신옹주(恭愼翁主) - 귀인 엄씨 소생

청주 한씨 보(한명회의 아들)의 아들인 청녕위(淸寧尉) 경침에게 출가하였으나 소생은 없다.

공신옹주는 연산군이 어머니 폐비 윤씨의 일로 죽인 엄씨의 소생인 까닭에 1504년(연산군 10) 아산으로 유배되어 고초를 겪었다. 중종이 즉위한 이후 신원되었고 아산 유배시 죽은 경침의 신주를 모시고 가서 조석으로 곡하고 모신 것을 갸륵하게 여긴 중종은 정려(旌閭; 추인,효자,열녀 들의 마을에 세우는 표시)를 베풀으며, 말을 방목하던 삼목도를 녹읍으로 받는 등 영화를 회복하였다.<서4녀> 경순옹주(慶順翁主)[1482 ~ ? ] - 숙용 심씨 소생이름은 옥환. 의령 남씨 경의 아들인 의성위(宜城尉) 치원에게 출가하여 1남 1녀를 낳았다.

 

<서5녀> 경숙옹주(敬淑翁主)[1483 ~ ? ] - 숙의 김씨 소생

여흥 민씨 종원의 아들인 여천위(驪川尉) 자방에게 출가하여 아들 1명을 낳았다.

 

<서6녀> 정순옹주(靜順翁主)[ ? ~ 1506] - 숙의 홍씨 소생

봉화 정씨 현의 아들인 봉성위(奉城尉) 원준에게 출가하여 아들 1명을 낳았다.

 

<서7녀> 숙혜옹주(淑惠翁主)[1486 ~ 1525] - 숙용 심씨 소생

이름은 벽환. 양주 조씨 광세의 아들인 한천위 무강에게 출가하여 아들 1명을 낳았다.

 

<서8녀> 경휘옹주(慶徽翁主) - 숙용 권씨 소생

파평 윤씨 승세의 아들인 영원위 내에게 출가하여 아들 1명을 낳았다.

 

<서9녀> 휘정옹주(徽靜翁主) - 숙의 김씨 소생

의령 남씨 흔의 아들인 의천위(宜川慰) 섭원에게 출가하여 딸 1명을 낳았다.

 

<서10녀> 정혜옹주(靜惠翁主) - 귀인 정씨 소생

1501년(연산군 7) 청주 한씨 형윤의 아들인 청평위(淸平尉) 기에게 출가, 소생은 없다.

1504년(연산군 10) 황해도 백천으로 유배되었다.

 

<서11녀> 정숙옹주(靜淑翁主)[1492 ~ ? ] - 숙의 홍씨 소생

이름은 여란. 파평 윤씨 승류의 아들인 영평위 섭에게 출가하였으나 소생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