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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대표팀 수비수의 꿈, 아직 버리지 않았다- 광주상무 박용호 인터뷰

블랙썬 2007. 6. 29. 12:47
 박용호, 그는 과묵하다. 축구인생 15년 동안 수비수로 살아서 그런 것일까? 그는 늘 뒤에서 묵묵히 자신의 할 일을 하는 사람이다. 성실이라는 단어는 어쩜 그를 위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친구는 좋아하되, 술은 하지 않는다. 즐겁게 노는 분위기를 좋아하지만, 결코 말이 많은 법은 없다. 혹자는 그 때문에 그를 바른생활 사나이라고 놀리기도 한다.

 박용호는 스스로 잔잔한 파도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그렇게 그는 지금, 강에서 바다로 흘러가는 중이다. 아직 바다에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파도의 여행은 계속 되리라. 그러다 보면 어느새 넘실대는 푸른 바다가 될 것이라 믿는다.

 바다를 닮은 남자, 박용호와의 인터뷰는 그렇게 시작됐다. 
 

 

 

-상무생활에 대해 이야기해주세요. 

 보통 여름에는 6시에, 겨울에는 6시 반에 일어납니다. 간단히 아침운동을 한 뒤 청소하고 아침을 먹습니다. 운동은 9시 반에서 11시 반까지 이뤄지며, 점심 후 다시 3시부터 5시까지 운동을 합니다. 저녁에는 체력운동을 한 뒤, 매일 10시에 취침합니다. 이렇게 하루 일과는 일반 군인들과 똑같습니다. 정리정돈은 항상 깨끗이 해야 하고, 물품관리 역시 저희들이 해야 합니다.
 
-훈련소에서 보낸 편지가 기억납니다.

 정말 많은 것들을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제 자신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목표를 설정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지금은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지만 사실 당시에는 조금 힘들기도 했습니다. 일단 안에 갇혀 있다는 것, 추위 속에서 점호를 취한다는 것 등이 참 힘들었습니다. 처음엔 제가 축구선수라는 사실 때문에 신기하게 보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훈련생 동기로서 전우애를 키워나가면서 금세 친해졌습니다. 단체생활에 있어서 어려움 역시 없었구요. 워낙 어릴 때부터 숙소에서 단체로 생활했으니까요. 다시 중고교 생활로 돌아가는 기분이었죠.
 
-고교시절 이천수 선수, 최태욱 선수와 함께 부평고 3인방으로 유명했는데요.

 그 시절은 제게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좋은 추억도 많았구요. 임종헌 선생님 밑에서 즐겁게 운동하는 법, 동료들을 아끼고 경기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을 많이 배울 수 있었습니다. 동료들이나 후배들 모두 기량이 출중했고, 다들 운동장에서 열심히 뛰었습니다. 가장 재밌었고 자랑스러웠던 그때만 생각하면 웃음이 절로 나오죠.
 
-행복했다고 회상하는데, 사실 고등학교 시절이 가장 힘들 때 아닌가요?

 당시 다른 학교 친구들이 다 저희를 부러워했어요. 저희는 정말 웃으면서 즐겁게 운동을 했거든요. 경기에 나가면 항상 이겼는데 그것만큼 즐거운 것도 없었죠. “너희는 어떻게 매번 이기냐?” “선생님이 어떻게 가르치냐?” 등을 물어볼 정도였으니까요.

 

-원래 고려대학교에 진학하려 했죠?

 부평고 시절 전국체전을 앞두고 고려대학교 송추훈련장에서 합숙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진로를 고대로 잡고, 잠깐 일주일 정도 숙소생활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다 보니...
 
-나중에 함께 고대에 가기로 결정한 친구들에게 미안하다며 울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임종헌 선생님께 가장 많이 죄송했습니다. 저를 아껴주시고 많이 가르쳐주셨는데, 그렇게 되는 바람에 많이 울었고, 또 힘들었습니다. 특히 “너는 이제 내 제자가 아니다” 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 가장 힘들었어요. 물론 지금은 제가 연락도 자주 드리고, 선생님께서도 제게 좋은 이야기 많이 해주시지만, 아직도 마음 한 구석에는 미안한 마음이 남아있죠. 정말 그때만큼 고민도 많고 마음이 아팠던 시절도 없을 거에요.

 

-부모님의 뜻도 있었나요?

 일단 그런 것도 있었지만, 일단 처음에 고대에서 합숙했을 때, 제가 생각했던 고대와 현실이 많이 달랐어요. (이)천수와 제가 생각했던 고대는 정말 좋았거든요. 대학에 가면 정말 좋을 것이라는 환상이라는 게 있었죠. 당시 합숙소 분위기가 굉장히 서먹서먹했고, 적응도 잘 못했어요. 그 때문에 방황을 했는데, 마침 프로에서 제의가 들어왔어요. 당시 아버지도 많이 아프셨고, 부모님께서 많이 힘든 상황이었거든요.

 

 사실 부유한 형편에서 운동하는 친구들은 별로 없어요. 저 역시 그랬구요. 저도 다른 친구들처럼 한창 민감할 나이다보니 고가의 축구용품들을 굉장히 갖고 싶어 했어요. 그렇지만 부모님께 차마 사달라는 말씀을 못 드렸죠. 떨어진 거 수선해서 신고, 선배들이 쓰던 거 얻어 쓰고 그랬어요. 물론 부모님들은 그런 걸 싫어해서 돈을 빌려서라도 사주셨어요. 
 그래서 프로로 마음을 돌리게 됐어요. 통장으로 계약금이 입금되던 날, 어머니께서 “아들, 이 돈 엄마가 어떻게 써야할지 모르겠구나. 아들, 정말 고마워.” 라고 말씀하셨어요. 티는 안 났지만 많이 좋아하시는 게 느껴졌어요. 
 
 지금도 가끔 ‘그때 내가 대학에 갔으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생각을 해요. 그렇지만 큰 후회는 없습니다.

 

-대학진학 대신 프로행의 장단점이 있다면요.

 제게 좋은 영향을 끼친 것 같아요. 프로는 정말 운동만 할 수 있게 좋은 환경 속에서, 좋은 음식 먹게 하면서 운동시키거든요. 반면 대학에서 배울 수 있는 동료애나 끈기 같은 것들은 못 배우는 것 같아요. 그리고 일찍 프로에서 돈을 벌면 겉멋이 든다고 해야 하나? 그런 게 심해지는 경우가 있어요. 저희가 돈을 벌면 얼마나 벌겠어요? 돈을 버는 나이는 한정되었으니, 벌 수 있는 나이에 쓰는 것보다는 모으는 게 더 낫다고 저는 생각하거든요.

 

-그 뒤 ‘안양5인방’ 중 한명으로 불리며. 많은 기대를 갖고 입단을 하게 됐죠?

 그때는 별 느낌이 없었어요. 일단 저 뿐 아니라 함께 입단하는 동기들이 4명이나 있었거든요. 게다가 저를 스타가 아닌, 앞으로 구단에서 키울 재목으로 뽑아준 것이었어요. 그래서 ‘좋은 환경에서 운동하고 배운다’ 는 생각만 갖고 입단했습니다. 또 마침 그해 저희 팀(구:안양LG)이 우승을 했는데, 저희 덕분에 우승했다면서 ‘복덩이’라고 불러주셨어요. 좋은 기억 속에서 운동할 수 있었죠. 

 

-당시 조광래 감독님도 안양을 떠나면서 ‘박용호 선수를 비롯 안양 5인방을 발굴한 것’이 ‘감독생활에서 가장 기뻤던 순간’이라 하셨는데요.

 감사하죠. 정말 감독님은 자기 관리가 철저하세요. 저희가 프로선수기 때문에 운동에만 신경 쓰게 하셨어요. 저에게 노력의 중요성을 가르쳐주신 분이세요. 나중에 저도 그렇게 많이 생각하고 노력하는 훌륭한 지도자가 되고 싶어요.

 

-당시 같이 시작했던 최태욱 선수나 김동진 선수 등 동기들이 이제는 다른 위치에 있는데.

 부럽죠. (최)태욱이 같은 경우도 월드컵에서 좋은 활약보여 군 면제 받고 해외진출도 했잖아요. 지금 (김)동진이도 꾸준히 경기 뛰면서 인정받고 있구요. 저도 못한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친구들 속에서 처진다는 생각이 드니까 목표를 가진 선수로서 참 그렇더라구요. 그래도 저만의 계획이 있으니까, 앞으로 그 계획들 실천하자고 마음먹고 이곳에 왔습니다. 그러니 앞으로 열심히 해서 제대 후 더 좋은 모습으로 팬들 앞에 서 있으려구요.

 

-수비수라 관심을 덜 받는다고 생각한 적은 없나요?

 절대 그런 생각은 해보지 않았습니다. 저는 한 번도 제 위치에서 실망한 적이 없습니다. 당연히 저희 팀 선수들이 골을 넣고, 저는 상대 선수들의 골을 막고, 그러면서 결국 경기에 이겨야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단순히 골을 넣었다는 이유만으로 관심 받는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렇지 않은 선수도 충분히 많거든요. 굳이 골을 넣지 않아도 경기에서 그 무언가가 더 보여질 수 있도록 노력 중입니다.

 

-히딩크 감독시절, 앞으로 성장이 기대되는 수비수로 주목을 받은 적도 있지 않습니까?

 그 당시에는 너무 얼떨결이라 준비를 많이 하지 못했어요. 그렇지만 그 경험이 저에게는 값진 경험이었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지 알려주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다음에 또 그런 기회가 온다면 반드시 잡아야겠죠. 사람은 기회를 잡아야하는 것 같아요.

 

-상무에 입단하고 나서 ‘골 넣는 수비수’ 라는 새로운 별명을 얻게 됐습니다. 특별한 비결이라도 있나요?

 사실 제가 신장이나 점프력이 좋은 게 아니거든요. 헤딩 연습을 많이 한 덕분이죠. 누군가는 제가 점프력 하나는 일품이라고 했는데, 전 아니라고 생각해요. 점프력은 (조)병국이가 정말 좋은 편이죠.

 

 고등학교 때 임종헌 선생님이 ‘타이밍이 중요하다’며 헤딩 연습을 굉장히 많이 시킨 게 큰 도움이 된 것 같아요. 다른 친구들에 비해 헤딩 연습을 정말 많이 했어요. 밤에도 기구로 혼자 연습했고, 줄넘기도 많이 했어요. 그러다보니 그게 장점이 된 것 같네요. 그렇지만 사실 제가 골 넣는 것보다 저희 팀이 실점 안하고 이기는 게 더 좋더라구요.

 

-임종헌 선생님 이야기가 많이 나오네요. 그만큼 본인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선생님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된 선생님이시죠. 제가 부평고 1학년이었을 때 저희 학교에 오셨어요. 당시 1학년이면 당연히 형들 뒷바라지를 하게 되는데, 선생님이 오시면서 저희 능력을 인정해주시고 기회를 많이 주셨어요. 많이 부족해도 경기에 참여시키고 형들과 같이 운동할 수 있게 해주셨어요. 그때 가장 실력이 많이 늘게 된 것 같아요. 그러다보니 플레이하기가 더 쉬워졌고, 자신감도 많이 생겼죠. 3학년 때는 다른 친구들이 한 수 아래로 보일 정도였으니까요. 
 
 경기에서 특별히 힘든 부분도 없었고, 재밌게 뛰다보니, 자신감도 정말 2배, 3배, 그 이상으로 찼죠.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수비수에게는 헤딩이 중요하다’며 ‘헤딩의 중요성’도 일깨워주셨어요. 또 주장이다 보니 어떻게 팀을 이끌어야하는지도 가르쳐주셨구요. 힘들 때는 선생님이 아니라 형처럼 다가와서 고민 들어주시고 해결책 가르쳐주시는 정말 고마운 선생님이셨습니다.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부평고 선수들이 야간에 몰래 훈련을 많이 했다고 들었어요.

 저만 그런 건 아니구요, 당시에는 정말 운동하는 게 낙이었어요. 한 친구가 운동하면 저는 더 하려고 했고, 그렇게 서로 운동 많이 하겠다며 경쟁이 붙었어요. (웃음)

 

-축구는 어떻게 해서 시작했나요?

 참 웃긴 이야기인데. (웃음) 사실 제가 초등학교 때 달리기가 빠른 편이었어요.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달리기 1등하는 사람 손들어,” 라고 하셔서 손을 들었더니 방과 후에 남으라고 하시더라구요. 그렇게 해서 축구를 하게 됐죠. 그런데 지금은 제가 조금 느린 편이거든요. 친구들에게 빨리 달린다고 축구를 시작했다고 하면 다 웃죠. 거짓말 하지 마라고. (웃음)
 
 그리고 처음에는 공격수로 뛰었어요. 일단 축구를 시작하면 흥미를 느낄 수밖에 없거든요. 그때는 성격도 활동적이어서 멋도 모르고 뛰어다니며 공격수로 축구를 시작했죠. 그러다 6학년이 되서 시합에 나가야하는데, 선생님이 포지션을 바꾸더라구요. “용호야, 뒤로 가라.” 그래서 제일 앞에서 제일 뒤로 가서 뛰게 된거죠.(웃음) 

 

-자신의 장점을 성실함이라고 했는데.

 저는 먼저 나서서 빗자루를 들고 쓰는 사람이에요. 운동할 때도 제일 먼저 하려고 하고, 남들보다 굳은 일이 있으면 먼저 하는 스타일이죠. 먼저 나서서 동료를 챙기는 마음이 예뻐보였나봐요. 그 때문에 고등학교 시절 선생님께 많이 인정도 받았구요. 그래서 선생님들이 지도자의 길을 걸으라고 권유해주시기도 합니다.

 

-경기장에서 쉽게 흥분하기보다 침착하게 경기를 풀어나가는 것 같아요.

 흥분을 잘 안하는데 그게 어떻게 보면 단점일수도 있어요. 상대 공격수랑 경쟁을 해야 하기 때문에 심한 태클이나 과격한 스타일을 좋아하는 선생님도 많거든요. 그런 부분에서는 제가 많이 부족하죠. 그렇지만 저는 제 플레이대로 뛰고 싶어요. 임종헌 선생님께도 그렇게 배웠고, 무엇보다 그것이 맞다고 생각해요.

 

-지금 상무 감독님은 어떤 스타일을 원하나요?

 페어플레이 정신으로 경기에 임하고, 파울을 하지 않는 선에서 정정당당하게 경쟁에서 이기는 스타일을 원하세요. 프로에서는 실수를 용납하지 않고, 바로 경기에서 빼고 질책하는데 저희 감독님은 늘 묵묵하세요. 선수들을 끝까지 믿고 기용해주시죠. 그래서 선수들이 상무에 들어오면 잃었던 자신감을 정말 많이 찾아요. 게다가 규칙적인 생활습관 때문에 몸이 건강해질 수밖에 없는데, 거기에 자신감까지 생기니까, 정말 플러스 요인밖에 없는 거죠.

 

-갑작스럽게 상무행을 결정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거든요.

 급하게 결정을 내렸죠. 당시에는 올림픽 대회까지 치루고 왔는데 팀에서 경기를 많이 못 뛰었어요. 그래서 독하게 마음먹기로 결심했고, 군대에 갔다 와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주위에서 그런 충고도 많이 해줬구요. 그래서 빨리 결정하게 됐어요.

 

-상무에 가기 전과 비교했을 때, 팀에서 김치곤 선수의 성장이 눈부십니다. 의식되지 않나요?

 부담되는 것은 사실이죠. 그렇지만 어차피 이곳은 경쟁세계고, 제가 살아남아야하는 곳이 바로 프로인데, 그걸 무서워한다면 프로선수가 될 자격이 없는 거죠. 저는 그 경쟁을 기다리고 즐기겠습니다.

 

-안타까운 이야기인데요, 박용호 선수는 중요한 대회를 앞두고 종종 다치는 것 같습니다. 청소년 대표시절 호주 전지훈련에서 다쳐 일본신년4개국친선대회에 출전하지 못했고, 부산 아시안게임과 아테네 대회도 다쳐서 많은 사람들이 걱정했죠. 본인은 아쉬움이 더 클 것 같습니다.

 아쉬움이야 정말 크죠. 한 게임을 나가기 위해서는 정말 힘든 운동이 필요하고, 그것을 다 참으면서 운동을 했는데, 다치면 시합에 못나가잖아요. 경기장에서 뛰는 동료들을 보면 정말 부러운 적이 많았어요. 그러다보니 부상을 숨기고 게임에 나가는 경우도 있는데 몸 상태가 좋지 않다보니 경기가 잘 될 수가 없죠. 그럴 때면 ‘나 때문에 동료한테 피해주는 거 아닌가’ 하는 죄책감도 많이 들었어요. 

 

-그래도 축구선수로서 엘리트 코스를 하나씩 밟으셨잖아요. 

 저를 부러워하는 사람들도 있겠죠. 그렇지만 저는 다른 사람들이 더 부럽거든요. (웃음)

 

-요즘 상무에서 스위퍼로 뛰는데 스토퍼로 뛰던 시절과 비교한다면.

 그동안 스토퍼로 뛰다 제가 건의해서 상무에서 스위퍼로 포지션을 바꿨습니다. 제 입장에서스위퍼가 더 잘 맞기도 하고, 제대 후 팀에 돌아가서 경쟁할 때도 스위퍼 자리가 더 경쟁력 있는 자리라고 생각해요. 이제는 멀티 플레이어 시대다보니 한 자리만으로는 경쟁력이 없죠.

 

-축구선수가 되지 않았다면 선생님이나 공무원이 됐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전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에요. 조용히, 무난하게, 잔잔한 파도처럼 사는 것이 더 좋아요. 튀면서 시선을 받는 것보다 묵묵히 내 할 일을 하고 싶어요. 그러다보면 누군가 곁에서 지켜주고 알아봐줄 것이라 믿어요.

 

-그렇지만 주변에 친한 선수들은 상당히 튀는 선수들인 것 같은데요.

 많이 튀죠. 그렇지만 둘 다 튀면 더 트러블이 많이 생기는 듯해요. 한쪽에서 조용히 쳐지면 재미있게 튀면서 받아주고, 그런 게 중요한 것 같아요. 그래서 조화가 잘 이뤄지는 것이겠죠.

 

-좌우명이 상당히 인상 깊어요. 지킬 것은 지키자. 특별한 의미가 있나요?

 사람이 살면서 자기 지킬 것을 지키는 것이 가장 잘 사는 비결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보다 더 잘하면 좋겠지만요. 기본, 기준, 목표 등은 언제나 높은데 그걸 지키려고 노력하며 살면 잘 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올 시즌 목표가 있다면.

 일단은 작년에 저희가 성적이 안 좋았습니다. 그래서 팀 성적이 좋을 수 있도록 제가 팀에 많은 보탬이 됐으면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부상 없이 많은 경기에 출장해야겠죠. 그리고 올해가 상무에서 보내는 마지막 해입니다. 내년이면 다시 팀에 돌아가니까 이곳에서 더 잘해서 인정받고 싶습니다.

 

-팬들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씀해주세요.

 저희 상무 응원해주시는 팬들은 정말 뜨거운 것 같아요. 적은 인원들이 저희만을 위해 응원해주셔서 항상 고마워요. 저희가 경기로서 보답을 해야 하겠죠.

 

 그리고 저에게 많은 관심 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편지, 응원의 문구들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제가 팬들에게 할 수 있는 최대의 선물은 경기장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좋은 모습으로 끝까지 남겠습니다. 응원해주시는 팬들, 모두 고맙고 아프지 말고 하시는 일들 다 잘됐으면 좋겠습니다.
출처 : 꿈을 쓰는 사람
글쓴이 : 꿈을 쓰는 사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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