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이씨 운천군파 (비금소종회)

전주이씨 운천군 할아버지 약사

블랙썬 2012. 12. 21. 09:46

[ 운천군(雲川君) 할아버지 약사(略史) ]

 

** 운천군 이인(李 忄寅)의 이름 인(心+寅)자는 마음심(心) 변에 寅자 이지만, 컴퓨터에는 그런 한자가 없어서 일반적으로 이인(李寅)으로 쓰지만, 이인(李 忄寅) 이렇게 표기해야 한다고 합니다.....

 

전주이씨 운천군파의 선원파조(璿原派祖)이신 운천군(雲川君)께서는 조선 왕조의 중흥을 이룩하신 성종대왕(成宗大王)의 14남으로 휘는 인(小寅) 시호는 소회(昭褢)公이다. 운천군은 숙의홍씨(淑儀洪氏) 소생의 7왕자 완원군(完原君), 회산군(褱山君), 견성군(甄城君), 익양군(益陽君), 경명군(景明君), 운천군(雲川君), 양원군(楊原君)과 3옹주 혜숙(惠淑), 정순(精順), 정숙(靜淑) 중의 6남이다.

 

운천군은 1490년(성종21) 11월 24일(임인일) 태어나 1524년(중종19) 5월 14일 향년 35세로 별세 하였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성종대왕은 소회공(昭褢公)의 시호(諡號)를 내리고, 그 뛰어남이 남달라 9세(1498년)에 운천군으로 봉하였다. 그러나 연산군의 난폭한 통치와 왕자들에 대한 박해로 날마다 근심 걱정으로 세월을 보내다 중종반정으로 시름을 거두고 종사에 크게 공헌해 갈 즈음 장년의 한창 나이에 별세했다. 중종대왕도 3일간 정사를 폐하고 애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운천군은 형조참의 증 좌찬성 인손(仁孫)의 딸 안동권씨와 혼인하여 4녀만을 두었다. 사위는 사헌부감찰 이구(李山區), 신천군수 이종효(李宗孝), 종묘서령 박순년(朴舜年), 선감주부 이경종(李櫦宗) 등 이며(세 사위 성씨의 이(李)는 본관이 다름) 후사가 없어 형인 완원군의 아들 수례(壽禮 : 후에 이천군(伊天君)으로 봉함)를 계자로 삼았다. 따라서 오늘의 운천군의 후손은 혈통적인 측면에서는 완원군의 후손인 것이다.

 

운천군의 계자인 가덕대부 이천군(伊天君)은 남달리 뛰어난 인품과 극진한 효심을 지녔다. 아버지 완원군과 어머니 허씨 사이에서 2남 2녀 중 차남으로 1508년(중종3) 12월 계유일에 태어나 1568년(선조1) 6월 임인일에 별세하여 향년 61세이다.

특히 이천군은 종친의 어려운 일에 헌신적이었다. 중종, 인종 국상의 집례자로 크게 공헌을 했다는 기록만으로도 이를 알 수 있다.

 

이천군은 선릉 참봉 황정복(黃廷福)의 딸(후일 한산군부인韓山郡夫人으로 봉해짐)과 혼인하여 4남 3녀를 두었다. 의령부정:부(義寧副正:溥), 의흥부수:급(義興副守:伋), 의양군:수(義陽君:修), 의신군:비(義信君:備)등 4남은 모두 출중한 인걸로 국사와 종묘사직에 봉헌하였으며, 그 손자 손녀들이 번창하여 사람들이 이르기를 “이천(伊天) 종실의 어질고 귀한바가 끊임이 없으니 마장리(이천군 묘가 있는 곳) 현당(玄堂) 음덕이 백세토록 넘치고 있는 것이다.”라고 칭송하기도 하였다.

 

이천군의 장남인 의령부정은 1534년(중종29) 8월 28일 태어나 신인(慎人)진주 강씨와의 사이에 7남을 두었으며 1595년 2월 4일에 61세의 세수를 누리고 별세 하셨다.

 

의령부정의 장남 청산부수(菁山副守) 서(瑞)는 1549년(명종4) 10월 2일 태어나 숙인(淑人) 파평 윤씨와의 사이에 1남 2녀를 두었으며 1587년(선조20) 2월 20일 38세의 세수를 누리고 별세 하였다.

 

그러나 이토록 가계의 번성을 누렸던 종가가 간난(艱亂)의 가시발길과 몰락의 풍진에 휘말리는 풍운을 맞게 된다. 그것은 1636년(인조14) 병자호란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때 왕자와 비빈은 강화로 피난을 하였으나 인조대왕은 길이 막혀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다. 임금의 행차가 호병(湖兵)의 포위속에 들게 되니 백성들의 병화(兵禍)는참혹하기 그지 없었다.

 

그 중에서도 종가인 청산부수(菁山副守) 서(瑞)의 장남 시형(時亨) 댁은 그 처참함이 더욱 비길 데 없었다. 마침 그 때 시형은 변방을 지키고 있었다. 그의 신부인 청송심씨와 5대손 훈련판관 원정(元禎)과 숙부인 거창신씨는 호병들의 난동과 노략질에 굴하지 않고 칼에 엎드려 자결하였으며 시형의 아들(6대손) 충의위(忠義衛) 몽석과 어린 누이동생은 나이가 겨우 8세 6세였음에도 포로가 되어 심양으로 끌려 갔다. 다행히 연로한 노비 한 사람이 마니산(摩尼山)에 숨어 있다가 호군들이 철수한 후 세분의 시신을 거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 후 운천군의 현손 시형은 병란 중에 북방임지에서 귀가 하였으나 가족도 집도 다 잃어버린 처참한 나그네에 불과하였다. 이런 사정을 전해들은 인조대왕은 이를 애석히 여기고 토지와 은 백 냥과 집을 하사하고 또한 심양으로 잡혀간 몽석 남매도 돌아오게 하였다. 시형은 이 망극한 천은(天恩)에 만의 하나라도 보답하고자 다시 스스로 압록강 수비를 위해 임지를 향해 떠났으나 도착하자마자 병을 얻어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1639년 (인조 17) 3월 29일에 별세 하였다.

 

아버지마저 잃게 된 몽석 남매는 의탁할 곳이 없어 연로한 노비가 보살폈으나 왕자의 세손답게 의젓하게 장성하여서 병자호란때 자결한 세 분(신부인 청송심씨, 훈련판관 원정, 숙부인 거창신씨)의 묘를 강화로 모셨으며, 아버지 시형의 묘소도 압록강으로부터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마장리 운천군 묘 아래에 옮겨 모셨다.

 

이 후 종가는 원주 지방 금마촌(金馬村) 유동(柳洞)에서 살다가 다시 노성(魯城 : 현재 平昌)으로 이주 하였는데 이 때 종가의 내력을 잘 알고 있는 ‘노성사림(魯城士林)에서 이 슬프고 절의 있는 사연을 숙종대왕에게 상소한 바, 숙종대왕은 즉시 세분을 추앙하는 정문(㫌門)을 세우고 조묘(祧廟 - 조상의 묘를 멀리 옮겼다는 의미)를 짓도록 강원 도백에게 어명을 내렸다. 그러나 3백여 년이 지나는 동안 비바람에 씻기고 퇴락한데다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마장리의 운천군 묘와 떨어져 있어서 관리에 어려움이 많았다. 이제 후손들이 뜻을 합쳐 마장리로 옮겨 별묘로 모시고 단장을 새로 하였다.

 

현재 종현들은 뿔뿔이 흩어져 지내고 있으나 종친회를 중심으로 일심협력하여 해마다 제를 지내는 등 조상을 받들며, 운천군 자손으로서의 긍지를 안고 멸사봉공 가화번창에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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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이씨 운천군파 - 이인

 

[생애]

운천군 이인(雲川君 李寅, 1490년 ~ 1524년)은 조선의 왕족으로, 조선 제9대 왕 성종의 14남으로 시호는 소회(昭懷)이다. 생모는 숙의 홍씨(淑儀 洪氏)다. 정부인으로는 학성군부인 안동 권씨(鶴城郡夫人 安東權氏)이다. 자녀로는 정부인 권씨가 낳은 장녀 이계영(李桂英)과 차녀 이씨, 3녀 이주영(李珠英), 4녀 이씨와 장남(양자) 이천군 수례(伊川君 壽禮)가 있다.

(부인은 안동 권씨 인손의 딸로 딸 4명을 얻었다. 형인 완원군의 아들 이천군 수례로 후사를 이었다.)

 

[가족관계]

    • 부 : 성종

• 모 : 숙의 홍씨(淑儀 洪氏)

   • 누나 : 혜숙옹주 수란(惠淑翁主 秀蘭)

   • 형    : 완원군 수(完原君 㥞)

   • 형    : 회산군 념(檜山君 恬)

   • 형    : 견성군 돈(甄城君 惇)

   • 누나 : 정순옹주(靜順翁主)

   • 형    : 익양군 회(益陽君 懷)

   • 형    : 경명군 침(景明君 忱)

   • 동생 : 양원군 희(楊原君 憘)

   • 동생 : 정숙옹주 여란(靜淑翁主 如蘭)

 

• 정부인: 학성군부인 안동 권씨(鶴城郡夫人 安東權氏) - 권인손(權仁孫)의 딸

          • 장녀 : 이계영(李桂英) - 고성 이씨(固城李氏) 이구(李嶇)에게 출가

  • 차녀 : 전의 이씨(全義李氏) 이종효(李宗孝)에게 출가 

  3 녀 : 이주영(李珠英) - 밀양 박씨(密陽朴氏) 박순년(朴舜年)에게 출가

          • 4 녀 : 연안 이씨(延安李氏) 이경종(李慶宗)에게 출가

  • 장남(양자) : 이천군 수례(伊川君 壽禮) - 성종의 서3남 완원군의 아들

 

 

[운천군 이인 묘역 ( 雲川君李演墓域 ) ]

 

      주 소 :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마장리 산 36

                 ◈광탄면소재지에서 버스로 15분 배차시간 20분

 

      규 모 : ◈ 규모는 비신이 140×54×24㎝, 대석이 19×84×50㎝이다.

                 ◈ 묘역은 2기의 원형 봉분과 묘비, 문인석, 망주석, 장명등, 상석, 향로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계절은 장대석으로 쌓았다. 봉분의 뒤쪽으로는 적벽돌과 기와로 만든 곡장이

                     돌려져 있는데 곡장은 중앙부에서 바깥쪽으로 한 단씩 낮아지는 형상이다.

                 ◈ 묘비는 옥개석이 없고 상단이 둥근 갈의 형태이다. 비신은 회백색의 대리석이며

                     대석은 백색의 화강암이다.

                 ◈ 문인석은 얼굴이 매우 세빌하면서도 사실적으로 묘사되어있는 것이 특징이며

                     금관조복을 입고 홀을 양손으로 맞잡고 있는 형태이다. 규모는 195×35㎝로 매우큰

                     편이다. 망주석도 189×28㎝로 큰 편이며 연꽃무늬가 선명하게 남아 있다.

 

      형태 :  ◈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으로 송인이 지은 비문이 비교적 뚜렷하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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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운천군의 아버지는 성종이고 어머니는 숙의 홍씨 입니다..

숙의 홍씨의 아버지가  홍일동(홍길동의 형님) 으로 세조때 유명한 제상이십니다...

홍일동은 지조로서 유명합니다..  목에 칼을 들이대도 지조을 지켰다고 합니다..

이두호 만화가가 홍일동에 대해서 만화을 그린다고 하더군요.

특히 연산군때 숙의 홍씨 소생의 자식들이 고생을 많이 합니다.

형제가 많의니 그만큼 힘이 있었겠지요...

또한 성종에 엄청난 사랑을 많이 받은 분이.. 숙의 홍씨구요..

아무튼 연산군때 제일 고생한 일가가 우리 조상입니다..

결국 중종반정이 일어 나고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입니다...

운천군이 돌아가시자..중종은 3일동안 식움을 전폐했다고 하는군요..

 

 


운천군 파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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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주이씨 운천군파 종현께서는 상기 내용중 틀린 부분이 있다면 댓글로 알려주시면

   바로 수정토록 하겠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