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祖)와 종(宗)의 차이
1. 종(宗)과 조(組)의 차이
종(宗) |
조(組) |
'덕' 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문물을 융성 하게 한 왕 |
'공'이 탁월한 왕(개국한 제 1대왕 태조) |
27대 왕 중 9대왕을 뺀 나머지 |
태조. 세조. 선조. 인조. 영조. 정조. 순조 등 7명 |
왕위를 정통으로 계승한 군주 |
창업군주나 중흥군주 |
묘호(왕이 승하 한 후에 붙인 명칭, 종묘에 모시기 위함.) | |
묘호는 신료들이 왕의 일생을 평가해 정함. | |
폐위 된 왕에게는 묘호를 붙이지 않음(종묘에 모셔지지 못함.) | |
조와 종의 기준은 애매모호하며 당시의 정치적 형편에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 것임. |
2. 묘호가 바뀐 경우
○ 정종 : 조선 2대왕 정종의 경우 공정왕으로 불리다가 숙종대에 정종으로
묘호를 붙임.
○ 단종 : 세조에 의해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불리다가 200여년 후인 숙종
24년(1698년) 때에 복위되어 묘호를 단종으로 붙임
○ 선조 : 처음 묘호가 선종이었으나 국난(임진왜란) 극복 등 커다란 공이
있다고 일부신하들이 주장해 광해군대에 와서 선조로 바꿈.
○ 인조 : 본래 열종(烈宗)이라고 정하였던 것을 '호란'을 극복한 '공'을
인정해 효종대에 인조로 바꿈
○ 영조 : 조선이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는 과정에서 고종 황제의 직계
조상이라 하여 고종대(1897년)에 영종에서 영조로 바꿈
○ 정조 : 조선이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는 과정에서 고종 황제의 직계
조상이라 하여 고종대(1897년)에 정종에서 정조로 바꿈
○ 순조 : 철종대(1857년)에 순종에서 순조로 바꿈
[조(祖), 종(宗), 군(君), 시호(諡號)와 묘호(廟號)]
나라를 세웠거나 변란에서 백성을 구한 굵직한 업적이 있는 왕에 조(祖)를,
앞선 왕의 치적을 이어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며 문물을 융성하게 한 왕은 대개 종(宗)을
붙인다.
☞ 조(祖)와 종(宗)붙이는 방법은 정도전이 정한 것으로 태조실록에 '공(功)이 있는 이는 조(祖)로 하고
덕(德)이 있는 이는 종(宗)으로 한다'고 하였다.
◈ 조(祖), 종(宗) : 임금. 조와 종이 붙는 임금의 이름은 임금이 죽은 후 부르는 이름으로
묘호(廟號)라고 함
◈ 시호는 살았을 때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올리는 칭호이다
◈ 묘호는 왕의 일생을 평가 하여 정하며 종묘에서 부르는 호칭이다
조선시대의 왕은 사후에 자신이 살았던 일생을 평가받는다. 시호(諡號)와 묘호(廟號)가 그 것이다. 시호는 살았을 때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올리는 칭호이다. 묘호는 왕의 일생을 평가 하여 정하며 종묘에서 부르는 호칭이기도 하다.
태조, 정종, 태종, 세종 하는 등의 칭호가 묘호다. 묘호의 뒤에는 조(祖)와 종(宗)이 붙는데, 보통 조는 공(功)이 탁월한 왕에게 붙이고, 이에 비해 덕(德)이 출중한 왕에게는 종(宗)을 붙인다. 따라서 창업군주에 버금가는 중흥군주에게 종이 붙는다.
대체로 나라를 세웠거나 변란에서 백성을 구한 굵직한 업적이 있는 왕이나 피 바람을 일으킨 왕들이 조가 된다고 할 수 있다. 태조 이성계를 비롯하여 세조, 선조, 인조, 영조, 정조, 순조 등이 그에 해당한다. 앞선 왕의 치적을 이어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며 문물을 융성하게 한 왕은 대개 종(宗)자로 부른다.
「창업(創業)은 조, 수성(守成)은 종」이라 하면 외우기 쉬울 것 같다.「예기」의「공 (功)이 있는 자는 조가 되고, 덕(德)이 있는 자는 종이 된다」는 데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 다. 조선의 27 왕 가운데 태조, 세조, 선조, 인조, 영조, 정조, 순조 등 7명만 조 자를 썼다. 죽 어서 왕으로 대접받지 못한 연산군과 광해군을 제외한 나머지 왕들은 모두 종을 쓴다. 태조 는 나라를 처음 세웠기 때문에 조가 붙었다.
나머지 조 자 왕은 큰 국난을 극복했거나(선조, 인조), 반정을 통해 왕에 오른 경우(세조)이다. 영조, 정조, 순조는 숨지고 바로 종을 썼지만 후에 조 자로 바뀌었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조와 종을 나누는 기준이 불투명해졌다. 조와 종은 원래 격에서 차별있는 것은 아니지만 조가 종보다 나은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바람에 이런 이름 바꾸기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
사학자 신명호씨에 따르면 조를 붙일지, 종을 붙일지는 후세의 평가에 달려 있다고 한다. 심한 경우에는 이미 정한 묘호를 바꾸는 경우도 있다는 것. 예컨대 선조의 경우 처음의 묘호는 선종이었다고 한다. 공보다는 덕이 앞선다고 평가한 것 이다. 그러나 나중에 허균과 이이첨이 주장하여 이를 선조로 바꾸었다. 임진왜란 때 왜구를 물리친 커다란 공이 있다는 것이 그 근거였다.
또 중종의 경우는 연산군을 몰어낸 큰 공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여 중조로 하자는 주장이 인종에 의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신료들의 반대로 그냥 종을 붙이는 쪽으로 결정되었다.
폐위된 왕에게는 군(君)이라는 호칭이 붙었다. 왕으로서 조선시대 유교적 질서에서 크게 벗 어난 부도덕한 행위를 저지른 군주에게 붙여졌다. 연산군과 광해군이 그들이다. 이들은 왕의 자격을 박탈당한 군주이기에 종묘상의 묘호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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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祖)와 종(宗)과 군(君) 에 대해서....
이 차이를 알기 전에 먼저 알아두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조'와 '종'같은 명칭을 일컬어 묘호라고 하는데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는 종묘에 신위를 모실 때 쓰기 위한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해서, 왕이 죽고 난 후에 붙인 명칭입니다.
이 묘호의 뒤에는 '조'와 '종'이 붙습니다.
보통 '조'는 '공'이 탁월한 왕 에게 붙이게 됩니다.
즉, 나라를 세웠거나 변란에서 백성을 구한 커다란 업적이 있는 왕이 조가 되지요.
ex)태조-조선개국, 선조-임란극복
그리고 앞선 왕의 치적을 이어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문물을 융성하게 한 왕은 '종'으로 부릅니다.
①이러한 묘호는 신료들이 왕의 일생을 평가해 정했다고 합니다.
②또 경우에 따라서는 이미 정한 묘호를 바꾸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2대 '정종'이란 묘호는 사후에 바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
숙종 7년인 1681년에 와서야 진상되어 묘호를 정종이라 사용하게 되었고..
그 이전에는 명나라 황제에게서 받은 시호인 '공정'을 칭호로 삼아..
'공정왕'이라 했기에 실록 역시 '공정왕실록'이라 했었습니다.
예를 들면 선조의 경우, 처음 묘호가 선종이었으나 국난(임진왜란) 극복 등 커다란 공이 있다고 일부신하들이 주장해(허균·이이첨 등) 선조로 바꿨다고 합니다. (선종→선조)
단종 같은 경우는 숙부 세조에 의해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불리다가 사후 200여년 후인 숙종 때에 와서야 묘호를 단종으로 불려진 경우입니다. (노산군→단종)
이와는 다르게 '군'이라는 칭호도 보입니다.
'-군'이라는 것은 원래 왕자들이나 왕의 형제. 또는 종친부나 공신에게 주어지던 호칭입니다.
연산군과 광해군은 둘다 분명히 반정에 의해 축출된 경우입니다.
그리고, 단종처럼 묘호가 올려지지 않은 왕들로써 아직까지도 왕으로 대접받지 못하고 군으로 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역대 왕과 왕비 추존왕(실제로 왕위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죽은 뒤에 묘호가 내려진 왕)과 왕비의 신위가 봉안되어 있는 왕실의 사당인 종묘에서도 광해군과 연산군의 신위는 찾아 볼 수 없답니다.
조선시대에 시호없이 호칭되는 '-군'은 부도덕하면서 무능하여 국가와 민생에 커다란 해를 끼친 폭군에게 붙여졌습니다.
이 같은 군주로는 노산군, 연산군, 광해군이 있었는데 노산군은 후에 숙종 때 단종으로 복위됩니다. 숙종 전까지의 노산군도 그 칭호만 놓고 보면 무언가 큰 잘못을 저지르거나 무도한 왕으로 인식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노산군이 단종으로 복위되었듯이 폭정 사실이 두드러진 연산군과는 다소 달랐던 광해군에 대한 평가도 그의 공과에 따른 재평가는 끊이질 않고 있습니다.
광해군을 폭군으로 몰아낸 이유로는 실록인 광해군일기에 잘 나타나 있는데 "명이 임진왜란 때 나라를 다시 세워준 은혜는 만세토록 잊을 수 없다.
선왕이 즉위하여 40년 동안 지성으로 사대하여 평생 등을 서쪽으로 대고 앉은 적이 없었다.
광해군은 배은망덕하여 천명의 두려움을 모르고, 음흉하게 두 마음을 품어 오랑캐에게 정성을 바쳐 기미년 오랑캐를 칠 싸움에 이르러 장수에게 '정세를 보아 향배를 정하라'고 일렀습니다.
우리 삼한 예의의 나라로 하여금 오랑캐와 짐승의 지경으로 돌아가게 하였으니 통탄해 본들 어찌 말을 다하겠는가?"
위의 기록에서 보이듯 첫째, 임진왜란의 은인인 명의 은혜를 저버렸다는 것과 둘째, 임해군·영창 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유폐하여 인륜을 어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명을 배반했다는 것은 후에 정묘·병자호란을 자초한 정통 성리학자인 서인의 정책과 비교해 볼 때 떠오르는 후금(후에 청)과 지는 명 사이에서 실리적인 중립외교를 표방함으로써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는 전쟁을 피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오히려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둘째의 경우도 후궁 출신의 광해군이 뒤늦게 적자로 태어난 영창대군의 지지 세력에 의해 그의 자리가 위협을 받는 속에서 저지른 경우이기에 많은 정권 다툼의 하나로 보아야지 그에게만 인륜의 굴레를 씌어 비난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만약 그게 그렇게 큰 문제라면 태종·세조·영조 등도 인륜으로 그 책임을 물어 당연히 시호가 없어야할 것입니다.
그리고 광해군이 임진왜란 때 의주로 피난간 선조를 대신하여 의병을 독려하고 민심을 수습하면서 크게 활약했고, 전쟁 후에도 사고의 정비, 동의보감 같은 서적 편찬, 성곽병기 수리, 양전 사업과 호패 실시 등의 정책으로 복구 사업과 민생 안정을 위해 크게 노력한 업적은 높이 평가할 만한 것입니다.
즉, 인조를 비롯한 서인 세력들이 정권 탈취를 합리화하기 위해 '광해군'으로 깎아 내렸고, 이후 계속해서 서인이 집권하는 바람에 복위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반대로 즉위하여 군림하지는 못하였으나 후에 왕으로 추존된 이들에게도 묘호를 올렸습니다.
성종의 생부인 덕종, 인조의 생부인 원종, 정조의 생부인 장조, 헌종의 생부인 익종입니다.
이들은 모두 왕자의 신분 이었으나 사후에 아들들이 왕이 되어 국왕의 지위로 예우 격상된 경우입니다.
그러나 선조의 생부인 덕흥대원군이나 고종의 생부인 흥선대원군은 왕자가 아니었고..
또 소목의 차례에도 맞지 않아 왕으로 추존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훈민정음을 창제하신 세종은 현재에는 '세종대왕'으로 추앙을 받고 있지만..
당대에는 '조'의 반열까지 오르기에는 미흡한 왕으로 인식되었던 경우입니다.
묘호는 원칙적으로 창업 개국한 왕과 그의 4대조까지만 '할아비 조(祖)'(자)를 붙이고..
그 뒤를 이은 왕들에게는 '종통'의 계승자라 하여 '-종'를 붙이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그러나, 조선왕조에서 정통성으로 왕을 계승한 경우는 태조를 제외한 왕의 계승자 26명중..
단, 7번에 지나지 않습니다. (적장자는 6번)
○ 조(祖)
태조. 세조. 선조. 인조. 영조. 정조. 순조 등 7명.
창업 군주, 중흥 군주나 큰 국난을 극복하였거나, 반정을 통해 즉위한 왕.
○ 종(宗)
27명의 왕 중 9명을 뺀 나머지 왕들 로 '수성'을 한 왕에게 붙임.
조와 종의 기준은 애매모호하며 당시의 정치적 형편에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 것임.
[수성(守成)이란? 선왕이나 부조가 이룬 업을 이어서 지킴]
○ 군(君)
연산군.광해군
반정으로 축출됨으로써 서출 왕자에게 쓰는 군으로 강등됨.
실록도 연산군 일기.광해군 일기로 차별을 받음.
○ 조(祖)에 대한 의문점
태조는 왕조를 개창하였기 때문에 '조(祖)'가 붙습니다.
세조는 조카를 내쫓고 왕위를 차지하였다는 단점이 있지만..
당시의 인식에서는 왕권을 강화하였다는 뜻에서 '조(祖)'를 붙였습니다.
선조는 애초에는 선종이었지만 선조로 바뀌었습니다.
처음에는 공보다는 덕이 앞선다고 평가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광해군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려는 의도도 있었겠지만..
선조가 임진왜란이라는 시대적인 위기를 극복하였다는 점과..
선조연간을 '목릉성세(穆陵盛世)'라고 하는 데서 보듯이..
문화적인 치적을 남겼음을 평가하는 것이었다 하겠습니다.
인조는 본래 '열종'이었는데, 반정에 의해서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하였기에..
다시 왕통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로 조가 쓰였습니다.
조선 후기의 영조와 정조, 순조는 모두 원래는 종이었다가..
순조는 철종대에, 영조는 고종대에, 정조는 광무3년에 각각 조로 바뀝니다.
그렇게 바뀐 이유는 대상이 되는 왕 자체에 대한 평가가 달라졌다기 보다는..
바꿀 당시의 정치적 목적이 깊이 개입된 것이기에 별도로 따져 보아야 할 문제라고 여겨집니다.
묘호를 정할 때는 흔히..
"조공종덕(祖功宗德)"이니 "유공왈조 유덕왈종(有功曰祖, 有德曰宗)"이라 하여..
공이 많으면 -조, 덕이 많으면 -종를 붙인다는 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애매한 원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이 많은지 덕이 많은지 판단하는 것은..
그야말로 주관적인 것이므로 묘호를 정할 때의 의논에 좌우되기 마련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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