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이씨 운천군파 (비금소종회)

전주이씨 운천군파 비금 입도 유래

블랙썬 2012. 12. 24. 17:35

[전주이씨(全州李氏) 운천군파(雲川君派) 비금 입도 유래]

 

성종대왕(成宗王子)의 16왕자 중 15번째 왕자님이신 운천군(雲川君) 조부가 우리의 파시조(派始祖)이신데 운천군 조부께서 35세의 나이로 돌아가실 때 아들이 없어서 같은 숙의홍씨(淑義洪氏)의 소생인 완원군(完原君)의 둘째 아드님이신 이천군(伊川君)을 양자로 입적시켜 대를 이으셨다.

이천군(伊川君)의 장남이 ‘의령부정:부(義寧副正:傅)’이시고, 이분의 4남이 우산부령:기(牛産副令:玘)이신데 이분의 손자이신 본정(本禎)조부께서 진도로 귀양을 오시게 되었다.

소위장군(昭威將軍) 본정(本禎)조부님은 아버지 시응(時膺)과 어머니 광산김씨 사이에서 1598년에 차남으로 태어나셨다. 본정(本禎)조부께서는 문무를 겸비한 인재(人才)로 광해주(光海主) 정사년(1617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20세 약관의 나이에 소위장군(昭威將軍) 정4품에 등용 되셨다.

조선 14대 임금이신 선조와 공빈김씨 사이에서 둘째 왕자로 태어난 광해군(서출)은 우여곡절을 겪고 왕위에 등극하여 왕권을 안정시키는 과정에서 임해군(광해군의 동복 형), 영창대군(인목황후 소생: 적출) 등 왕위를 위협하는 인물들과 그들을 떠받치고 있던 서인과 남인 세력을 차차 제거하고 무오년(1618)에 인목대비마저 폐출시키는 등 사색당파에 휘말려 폐륜행위가 잦고 정치가 문란해지자 성품이 강직하고 불의와 타협할 줄 모르는 본정(本禎) 할아버지는 이를 탄핵하는 상소문 「아성조 이후 혹세난민 무이(我聖祖 以後 惑世亂民 無二(태조대왕께서 나라를 창건하신 이후 역대 임금 중에서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는 둘도 없는 왕이다)」라는 상소문을 올린 것이 화근이 되어 역모로 몰려 무오년(1618)에 전라도 진도 가사도로 귀양을 오시게 되었다(戊午年 珍島 謫居).

1623년 3월 12일 광해군의 폐륜행위에 불만을 품은 세력들이 무력정변을 일으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능창군을 왕으로 옹립하게 되었다.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왕위에 오른 능창군은 광해군에 의해 희생된 영창대군, 임해군, 인목대비 등의 신분을 복원시키고 나머지 삭탈관직자와 유배자들의 관직을 복원시키고 귀양을 풀어 신분을 복귀 시켰는데, 소위장군 본정(昭威將軍 本禎)할아버지께서는 유배지가 전라도 진도 가사도 외딴섬이어서 뱃길이 험란하여 심부름하는 사람이 고의로 전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알려주어야 할 사람이 정적(政敵)이어서 일부러 방면소식을 알려주지 않아 방면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지 못하고(伋未蒙放) 무인년(1638년) 8월 25일 41세의 나이에 돌아가셔서 가사도 유배지에 묻히셨다.

통정대부(通政大夫) 공조참의(工曺參義) 세문(世文) 할아버지는 아버지 소위장군 본정과 어머니 숙부인 월성 김씨 사이에서 1633년 1월 15일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나 아버지의 유배지에서 성장하여 한양(지금의 서울) 본가를 찾아 귀경길에 올랐으나, 전라도 장성에 이르러 여독으로 병석에 눕게 되었다. 세문 할아버지는 그곳 장성에서 병 치료에 심혈을 기울였으나 병은 차도가 없고 점점 쇠약해지자 한양 본가를 찾아가는 일을 접고 장성 북면에 정착해 사시게 되었으며 슬하에 두남(斗南) 두학(斗學) 형제를 두시고 1713년 9월 25일 한 많은 여생을 마치게 되어, 전남 장성 북면에 묻히셨다.

전라도 장성 북면에서 태어나 성장한 두남(斗南) 조부께서는 본정(本禎) 할아버지가 유배지 진도 가사도 섬에 묻혀 계시니 본정 할아버지의 유해를 찾아 꼭 선영에 모셔야 한다는 아버지(世文)의 간곡한 유언을 실행코자 진도 가사도를 찾아 가신다는 것이 비금 당두리에 이르게 되었으나 그때만 해도 교통이 불편해서 비금도 사람들이 가사도가 어디쯤에 있는지도 모르고 뱃길도 없어 본정 할아버지의 묘소를 찾겠다는 생각을 잠시 접고 비금면에 정착하고 말았다.

총각의 몸으로 비금도에 입도(入島)하신 두남(斗南) 할아버지는 광대리에 사시는 함양박씨와 결혼하여 용소리에 터전을 잡아 가세를 형성하였으니 우리가 바로 이 분의 후손들이다.

우리 후손들은 본정할아버지의 무덤을 찾아 선영에 모시겠다는 두남(斗南)조부의 효행심 덕택으로 묘소를 잃어버리지 않고 지금도 격년제로 참배의 기회를 가질 때면 진도군 지산면 가학리에서 가사도까지 모터선으로 건너가 참배하곤 하는데 ‘가학리’ 주민들은 “소위장군(昭威將軍)의 후손들이 교통도 불편한 머나먼 이곳 가사도까지 조상의 묘소를 찾아 참배왔다”고 소곤거리는 소리를 들을 때면 장군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을 갖게 된다.

종가(宗家) 상량(上樑)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집을 지은 해가 가경(嘉慶- 중국연호)11년이라고 하였으니 1806년이고 상묵(尙黙)조부께서 17세 때이고 보니 두남조부의 손자님이신 곤(坤)조부께서 지은신 것으로 이 때 9칸 겹집으로 그 정도의 큰 집을 지은 것으로 보면 대단한 가세였음을 짐작케 한다.

입도조(入島祖) 두남(斗南)조부의 아드님이신 부용(富龍)조부께서는 1746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함경도 변방을 수호하신 공적을 인정받아 벼슬이 절충장군 중추부사 당상관에 이르렀으며 1795년 (정조19년) 본정(本禎) 조부의 명예를 회복하는 교지를 받는 것을 비롯해서 정조대왕게서 ‘건융(乾隆) 60년(1795) 학생 이세문 증 통정대부 공조참의자(學生 李世文 贈 通政大夫 工曺參義者)’라는 세문 조부에게 통정대부에 봉하는 교지가 내려졌으며 두남(斗南) 조부에게도 통정대부에 봉하는 교지가 내려졌는데 이 교지들은 지금 장손이신 귀문(貴文) 종현님이 소장하고 계신다.

두남(斗南) 조부의 고손이신 수성 조부께서는 문장가로  "하은집(霞濦集)"을 남기셨는데 책으로 발간키 위해 외지인(해남인)에게 의뢰하였으나 끝내 되찾지 못해 후손인 저희로서는 정말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개화기에 들어서면서 비금의 초대 면장을 지내신 이봉래(李鳳來)면장님의 업적은 지대하여 면민들이 공적비를 세워 줬는데 그 내용은 「행공집무이십사모 학교육영 해사숙수 국지해제 민토복기(行功執務二十四慕 學校育英 該事夙受 國地解際 民土復其) : 면장으로 24년동안 재직하시면서 많은 공적을 남기셨는데 맡은바 책무는 신속히 처리하시고 육영사업에도 힘썼으며 국유지를 사유지화하여 면민들에게 경작케 한 공이 커 면민의 정성을 모아 공적비를 세운다」라는 공적비를 세워준 것은 우리 가문의 자랑이었다. 지금도 각계에서 전주리씨(全州李氏) 운천군파(雲川君派) 자손으로서 자기의 본분을 다하며 각계의 추앙을 받고 있는 형제가 많다는 것 또한 우리 가문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출처  : "전주리씨 운천군파 비금 종중 약사" 중에서 발췌

 

* 운천군파 비금종중 종친께서는 상기 내용중 틀린 부분이 있다면 댓글로 알려주시면

  바로 수정토록 하겠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