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이안사와 전주이씨]
이안사(李安社)는 이성계의 고조부로 당초 전주의 유력한 세력가였다. 이때는 몽고군의 고려 침략이 한창이었던 고종 후반기였다.
이안사는 어느 관기(官妓)의 일로 문제가 생겨 전주에 더 이상 살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외가쪽이던 강원도 삼척으로 이주했다. 삼척에는 이안사의 부친 이양무(李陽茂)의 묘인 준경묘와 어머니 묘인 영경묘가 있다.
이안사는 전주 관기(官妓) 하나를 총애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지주사(知州事)가 전주 고을 안렴사로 부임하는 산성별감(山城別監)을 접대하기 위해서 그 관기를 수청들게 하였다.
평소 지주사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이안사는 크게 노했다. 많은 기생들 중에서 왜 하필이면 자신이 총애하는 기생을 수청들게 하는데 대해 심기가 뒤틀린 것이다.
그러자 지주사는 안렴사와 의논하여 이안사를 역적으로 음해한다. 전주이씨 3세 천상(天祥)의 묘가 기린산 왕자봉 밑에 있으므로 후손 중에 왕이 나와 고려 조정을 무너뜨릴 염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또 당시 유행하던 이씨가 왕이 된다는 목자왕기설(木子王氣說)을 이안사에게 뒤집어 씌웠다. 이런 사실이 고려 조정에 알려지면 역모죄로 멸문지화를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안사는 가족을 거느리고 삼척으로 도망을 쳤다. 삼척시 미로면 활기동에서 자리를 잡고 산지 1년 만에 아버지(이양무) 상을 당했다. 이안사는 아버지 묘 자리를 구하려고 사방으로 헤매었다. 그러다 몹시 고단하여 잠시 쉬고 있었다.
이때 한 도승이 동자승과 함께 나타났다. 주위를 두루 살펴 인적이 없음을 확인한 뒤 한 곳을 가리키면서 "대지(大地)로다 길지(吉地)로다"하는 것이었다. 이안사가 나무 밑에 앉아 지켜보고 있는 것을 모르는 도승은 동자에게 말했다.
"이곳이 제대로 발복하려면 개토제(開土祭)에 소 백(百)마리를 잡아서 제사를 지내야 하고, 관을 금으로 만든 것을 싸서 장사를 지내야 한다. 그러면 5대손 안에 왕자가 출생하여 기울어 가는 이 나라를 바로 잡고 창업주가 될 것이다. 이 땅은 천하의 명당이니 함부로 발설하지 말라" 하고 떠났다.
이안사는 곧장 집으로 돌아와 생각에 골몰했다. 가난한 살림살이에 소 백 마리와 금으로 만든 관을 어디서도 구할 수가 없었다. 그는 궁여지책을 찾아낸다. 소 백(百) 마리는 흰소(白牛) 한(一) 마리로 대신하고 금관은 귀리 짚이 황금색이니 이것으로 대신하면 될 것 같았다.
마침 처가에 흰 얼룩소가 있었다. 흰 소를 한자로 쓰면 백우(白牛)이므로 숫자상 일백 백자와 발음이 통하게 되어 백우(百牛)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결국 이안사는 처가의 소를 잡아서 제물로 사용하고 부친을 넣을 관은 귀리 짚으로 대신했다.
그 뒤 이안사는 삼척에서 차츰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자신과 갈등이 있었던 전주 지주사가 관동안렴사로 부임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에게 발각되는 날이면 죽음을 면치 못하므로 다시 일족을 거느리고 함길도(지금의 함경도) 덕원군 용주리로 도피한다. 무예가 뛰어난 그는 여진족의 천호(千戶) 벼슬을 하면서 차차 그 지방에서 기반을 닦기 시작했다
원에 귀순한 이안사와 그 관할 아래 있는 민호(民戶)는 고려의 영토를 떠나 여진족이 사는 지역이다. 결국 원의 통치를 받는 두만강변의 알동(斡東)에 옮겨 살게 된다. 이안사는 원제(元帝)로부터 겸달로화적(兼達魯花赤)에 임명된다.
이 직책은 그의 아들 이행리(李行里)에게 세습되었다. 7년 뒤 원 세조(쿠빌라이)가 일본을 침략하기 위하여 고려는 물론 원에 귀순한 사람들에게 군사 동원을 명령했다. 이때 이행리는 자기 관할의 군인을 징발하여 이 전쟁에 참여한다.
그 뒤 이행리는 알동에서 다시 선친이 자리잡았던 의주로 옮긴다. 여진족들 사이에서 이행리의 세력이 점차 커지자 여진 천호들이 그를 제거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그는 고려 군민(軍民)을 관할하는 달로화적(達魯花赤)이 되었다.
이행리는 등주(登州.안변) 호장 최기열의 딸과 결혼하여 이춘(李椿)을 낳았다. 그리고 등주를 비롯, 화주(和州)ㆍ함주(咸州.함흥)를 왕래하면서 주민을 이주시키고 영향권을 넓혀갔다.
이춘도 역시 아버지의 관직을 세습했다. 그는 의주에서 다시 함주로 옮겨갔다. 그 후 그의 손자인 이성계가 고려조에 출사하고 조선을 개국하기까지 이곳은 이 집안의 터전이 되었다.
이춘은 처음에 알동백호(斡東百戶)의 딸 박씨와 결혼하여 이자흥(李子興)과 이자춘(李子春)을 낳았다. 뒤에 쌍성총관의 딸 조씨와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았다. 그 뒤 이자춘이 아버지의 기반을 물려받게 되었다.
이씨 집안이 고려조에 출사(出仕)하게 된 것은 공민왕 5년 고려의 쌍성총관부 공격과 탈환이었다. 이보다 앞서 이자춘은 고려 공민왕을 만났다. 이미 중국에서 원이 쇠퇴하고 있었으므로 이자춘은 이때 고려로 귀순할 뜻을 가진 것이다.
공민왕도 약 1세기 동안 잃었던 영토를 수복할 뜻을 갖고 있었으므로 이자춘을 회유했다. 다음해 공민왕은 중앙정부에 포진한 기철(奇轍)을 비롯한 부원세력을 일소하고, 99년 동안 원에 빼앗긴 쌍성총관부를 공격, 영토수복에 성공한다.
이 전쟁에서 이자춘은 고려군에 협조, 공을 세우고 벼슬길에 나선다. 그는 판군기감사로 서강병마사를 겸했고, 천우위상장군을 거치면서 왜구방어에 공을 세웠다. 공민왕 10년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로 부임, 그곳에서 죽었다. 이자춘이 죽은 뒤 그의 세력은 아들 이성계에게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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