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이씨 운천군파 (비금소종회)

회안대군과 전주이씨

블랙썬 2012. 12. 24. 13:46

회안대군과 전주이씨

 

전주시 덕진구 금상동 법수뫼 마을에는 태조 이성계의 아들이자 태종 이방원의 바로 위형님인 회안대군 이방간의 묘소가 있다. 당초 회안대군과 전주와는 아무 연고가 없었다. 회안대군이 전주에 살다가 이곳에 묻힌 후 그 자손들이 대대로 터를 내린 것은 왕자의 난 때문이다.

이성계는 전처인 한씨 소생에서 여섯 형제, 후처 강씨(康씨) 소생에서 두 형제 등 모두 여덟 아들을 두었다. 이성계는 조선을 세운 뒤 여덟 째 아들인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다.

그러자 다섯째 아들인 방원이 불만을 품고 이성계의 후처 소생인 두 아들을 모두 죽인다. 이것이 1차 왕자의 난이다. 그 후 전처소생이자 둘째 아들인 방과가 세자가 되어 제2대 임금인 정종이 된다. 그러나 정종에게는 뒤를 이을 아들이 없었다.

따라서 동생들 가운데 누군가가 임금 자리를 이어야 했다. 이 자리에 가장 관심이 많았던 이들이 바로 넷째인 방간과 다섯째인 방원이었다. 두 형제의 권력 다툼은 정종 2년인 1400년 드디어 무력 충돌로 나타난다. 이 싸움에서 형 방간이 동생 방원에게 패하여 사로잡힌다. 이것이 2차 왕자의 난이다.

회안대군은 사형을 선고 받았으나 사면되어 황해도 토산으로 유배된다. 얼마 후 회안대군은 조선의 풍패지향인 전주로 옮겨 살 것을 허락받고 이곳으로 옮긴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태종도 나이가 들어 아들인 세종에게 임금 자리를 넘겨준다.

그러자 오래 전에 귀양을 보낸 형 회안대군이 그리워졌다. 그래서 태종은 형의 귀양을 풀어주고 한양으로 올라오라고 한다. 처음에는 이를 거절한 회안대군은 태종이 재차 올라오라고 하자 병중의 몸으로 상경한다. 그러나 회안대군은 도중에 은진 땅에서 병사한다.

이때가 1420년 회안대군의 나이 57세, 귀양길에 오른 지 20년의 세월이 지난 터였다. 회안대군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태종은 국장의 예우를 지내도록 하고 지관을 불러 길지를 택하도록 했다.

태종이 세 사람의 지관을 보내 묘소의 자리를 잡게 했다. 묏자리를 정한 지관들은 한양으로 돌아가 태종에게 결과를 보고했다. 태종이 < 어떤 자리이더냐 > 고 묻자 지관이 < 대대로 군왕이 나올 자리입니다 > 라고 대답했다.

태종이 깜짝 놀라면서 < 회안의 자손이 대대로 군왕이 된다면 내 자손은 어떻게 된다는 말이냐 > 라며 다시 전주로 내려가 지맥을 자르라고 했다. 지관들은 전주에 내려와 맥을 자르고 뜸을 떴다. 그 자리가 자그마치 수십 군데였다.

지관들이 다시 상경하여 태종에게 보고하기를 < 이제는 회안대군의 자손들이 대대로 호미 자루를 면치 못하게 되었습니다. > 라고 하자 태종이 그때서야 안도했다. 그로부터 거의 600년이 다 된 지금도 뜸자리와 맥을 자른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1, 2차 왕자의 난은 왕위 쟁탈 때문에 일어난 골육상잔이다. 그러나 지맥을 자른 것은 왕권 유지를 위한 < 죽은 자와의 골육상잔 > 이었다.

몇 년 전 회안대군의 묘소 인근에 노인시설 건축이 허가되자 종친회가 들고 일어났다. 혈과 맥이 끊어진다며 건축주를 상대로 자제해 줄 것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종친회측은 새로 들어설 노인시설 위치는 회안대군의 분묘와 600미터 직선거리에 있는 고양이 바위(일명 괭이바위)간의 혈과 맥을 끊는 위치라고 주장하면서 이의 철회를 강력히 주장했다.

그러면서 해당 부지를 종친회에 팔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한편 후손들은 회안대군의 묘소를 전북도에 문화재로 지정해주도록 요구하기도 했다. 회안대군은 살아서는 동생과의 권력 쟁탈에서 패해 평생 회한(悔恨)을 안고 유배지에서 살았다.

죽은 뒤에는 자신이 누워있는 묘소의 지맥이 끊어지는 아픔을 겪으면서 또다시 회한을 맛보았다. 그런데 이제는 이미 잘려나간 지맥을 지키기 위해 후손들이 앞장서고 있으니 살아서나 죽어서나 편할 날이 없는 것 같다.

한편 전주이씨의 분파는 122파이다. 거의가 왕자대군(적자)과 왕자군(서자)을 파조로 하고 있으며, 시대 구분에 따라 세 갈래로 나눌 수 있다.

이 태조의 고조부 이안사(李安社)의 상계에서 갈라진 파, 이안사 이후 이 태조 이전에 갈라진 파, 이 태조의 후손으로 왕자대군과 왕자군을 파조로 하는 파 등이다.

이안사(18세) 이전의 분파로는 시조 이한(李翰)의 14대 손인 이단신(李端信)을 파조로 하는 ▲문하시중공파, 15대손 이거를 파조로 하는 ▲평장사공파, 17대손 이영습(李英襲)을 파조로 하는 ▲주부동정공파, 이안사의 종손 이윤경(李允卿:목조의 종손)을 파조로 하는 ▲대호군공파, 이한 의 21대손 이귀을(李歸乙)을 파조로 하는 ▲문하평리공파 등이 있다.

이안사(목조) 이후 태조 이전의 분파로는 이안사의 아들인 이안천(李安川), 이안원(李安原), 이안풍(李安豊), 이안창(李安昌), 이안흥(李安興)의 ▲5대군파, 이행리(목조)의 아들인 이함녕(李咸寧), 이함창(李咸昌), 이함원(李咸原), 이함천(李咸川), 이함릉(李咸陵), 이함양(李咸陽), 이함성(李咸城)의 ▲7대군파, 이춘(李椿.도조)의 아들인 이완창(李完昌), 이완원(李完原), 이완천(李完川), 이완성(李完城)의 ▲4대군파, 그리고 이자춘(李子春.환조.태조 이성계 아버지)의 아들이자 태조의 서형제인 ▲완풍대군파, ▲의안대군파 등 18개의 파가 있다.

태조의 후손 분파(고종 이전까지)는 일반적으로 99파(25대군, 74군)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미혼으로 죽었거나, 후사가 없는 대군이 20명 정도가 되므로 실제로는 그 수가 이보다 적다. 전주이씨가 배출한 주요 인물들을 파별로 보면 정종, 태종, 세조, 성종 등 명군의 후손에서 압도적으로 많이 나왔다. 전주이씨 파명록은 다음과 같다.(가나다순)

견성군파/ 경령군파/ 경명군파/ 경창군파/ 경평군파/ 계성군파/ 계양군파/ 광평대군파/ 근녕군파/ 금성대군파/ 금원군파/ 낙선군파/ 능원대군파/ 능창대군파/ 담양군파/ 덕양군파/ 덕원군파/ 덕천군파/ 덕흥대원군파/ 도평군파/ 무림군파/ 무산군파/ 밀성군파/ 봉성군파/ 봉안군파/ 석보군파/ 선성군파/ 성녕대군파/ 소현세자파/ 수도군파/ 수춘군파/ 순평군파/ 순화군파/ 숭선군파/ 시중공파/ 신성군파/ 안양군파/ 안원대군파/ 안창대군파/ 안천대군파/ 안풍대군파/ 안흥대군파/ 양녕대군파/ 양원군파/ 연령군파/ 영산군파/ 영성군파/ 영양군파/ 영왕파/ 영응대군파/ 영풍군파/ 영해군파/ 온녕군파/ 완성대군파/ 완원군파/ 완원대군파/ 완창대군파/ 완천대군파/ 완풍대군파/ 용성대군파/ 운천군파/ 월산대군파/ 의령군파/ 의안대군파/ 의왕파 의창군파/ 의평군파/ 은안군파/ 은전군파/ 이성군파/ 익녕군파/ 익안대군파익양군파/ 익현군파/ 인성군파/ 인평대군파/ 인흥군파/ 임성군파/ 임언군파임영대군파/ 임해군파/ 장천군파/ 전성군파/ 정석군파/ 종의군파/ 주부공파진남군파/ 진안대군파/ 창원군파/ 평장사공파/ 한남군파/ 함녕군파/ 함령대군파/ 함릉대군파/ 함성대군파/ 함양대군파/ 함원대군파/ 함창대군파/ 함천대군파/ 함평대군파/ 해안군파/ 혜령군파/ 화의군파/ 회령군파/ 회산군파/ 회안대군파/ 효령대군파/ 후령군파/ 흥안군파/

 

 

 

 

( 정복규 논설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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