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이씨 운천군파 (비금소종회)

무학대사와 이성계(1) (2)

블랙썬 2012. 12. 24. 13:43

무학대사와 이성계 (1)

 

무학 자초(自超,1327~1405)는 무학대사(無學大師)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의 성씨는 박(朴)씨지만 본관은 알 수가 없다. 무학(無學)은 그의 호다. 무학은 경상남도 삼기(지금의 합천)에서 문하사랑 박인일의 아들로 태어났다.

18세에 소지선사(小止禪師)의 제자로 승려가 되어 구족계를 받고, 혜명국사에게서 불법을 배웠다. 진주(鎭州) 길상사와 묘향산 금강굴 등에서 수도하다가, 1353년(공민왕 2) 원나라 연경에 유학하여 그때 원에 와 있던 혜근(惠勤)과 지공(指空)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1356년 귀국하여 1373년에 왕사(王師)가 된 혜근의 법을 이어받았다. 1376년 혜근이 회암사에서 낙성회를 연 때 수좌(首座)로 초청하였으나 사양했다. 1392년 조선 개국 후 왕사가 되어, 대조계종사(大曹溪宗師)의 호를 받고 회암사에서 지냈다.

이듬해 태조를 따라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는 데 찬성하였다. 1397년(태조 6) 왕명으로 회암사 북쪽에 수탑(壽塔)을 세웠다. 1402년(태종 2) 회암사 감주(監主)가 되었다가 이듬해 사직하고, 금강산 금장암에 머물다가 죽었다. 저서에 불조종파지도(佛祖宗派之圖), 인공음(印空吟)이 있다.

이성계는 젊은 시절 꿈을 꾸었다. 그는 해몽을 잘한다는 점장이 노파를 찾아갔다. 노파는 "설봉산 토굴의 스님에게 물어보라“고 말했다. 스님은 "그 꿈을 남에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마을의 닭들이 일제히 '꼬끼오'하고 울어 댄 것은 '고귀위(高貴位)'란 뜻이니, 반드시 고귀한 지위에 오른다는 뜻입니다. 낡은 곳간에 들어가서 서까래 세 개를 등에 가로 짊어졌으니, 그 모양이 바로 임금 왕(王)자와 같습니다."

스님은“아직도 삼 년의 시간을 기다려야 할 터이니, 그동안 절을 세워 오백 나한을 모시고 정성껏 기도를 드리십시오." 이성계는 자신의 출생지인 안변 땅에 절을 지었다. 그 절의 이름이 석왕사이고, 그 스님이 바로 무학대사다. 훗날 태조 이성계는 무학에게 새 도읍지를 물색해 달라고 했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닌 무학은 매봉산 봉은사에서 하룻밤을 지낸 뒤 아침 일찍 절문을 나섰다. 넓은 들판을 가로질러 뚝섬 나루에 오니 배가 한척 기다리고 있었다. 한강을 건넌 무학은 들을 바라보며 '여기야말로 새로운 도읍지로구나'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에 한 노인이 밭에서 소를 몰고 있었다. 그 노인은 "허, 이놈의 소, 미련하기가 무학보다도 심하구나. 어찌하여 곧은 길을 가려 하지 않고 자꾸 돌아서만 가려 하느냐?"

무학은 깜짝 놀라 노인에게 물었다. "방금 소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노인이 힐끗 돌아보며 말했다. "요즘 무학이라는 작자가 새 도읍지를 찾아다닌다고 하던데 좋은 곳은 다 놓아두고 엉뚱한 데만 찾아다니니 이 어찌 미련하고 한심한 일이 아니겠소." 무학은 노인이 보통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노인에게 공손히 합장하고 말했다.

"소승이 바로 그 미련한 무학입니다. 제 소견으로는 이곳이 새 도읍지로 적격이라고 생각했는데, 노인장께서 소승에게 한수 가르쳐 주십시오." 노인은 채찍을 들어 한 쪽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여기서 10리를 더 가서 지형을 살펴보도록 하시오."

무학이 정중히 허리를 굽히며 노인에게 인사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보니 노인과 소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고개를 갸우뚱한 무학은 노인이 가르쳐 준 대로 서북쪽으로 10리를 걸었다. 그렇게 해서 당도한 곳이 바로 경복궁 자리였다.

이곳은 주변의 경관도 경관이려니와 지세가 너무나 새롭게 뻗어 나가고 있었다. 삼각산을 주봉으로 하여 남산이 안산으로 알맞게 자리했다. 인왕산이 한 녘에서 기운을 북돋아 주고 있었다. 그는 삼각산 인수봉에 올랐다. 거기는 한 노승이 5백 나한에게 예배하는 형국을 띤 자리였다. '그래, 이 인수봉을 안으로 넣고 성을 쌓으면 불교도 오랫동안 민중들 속에서 제 구실을 다할 것이로다'

무학은 그 다음 인왕산에 올랐다. 산에 올라 삼각산 자락을 내려다보니, 참으로 명당 중에 명당은 자신이 처음 당도했던 그곳이었다. 그는 남산으로 올랐다. 북쪽으로는 아늑한 지세가 자리하고 있었고 남쪽으로 한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그 너머로 자신이 지나온 청계산이 아련히 보였고, 과천 쪽으로는 관악산이 우뚝 서 있었다.

태조도 크게 기뻐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도성을 어디에다 쌓느냐는 것이었다. 무학은 인수봉 밖으로 쌓아야 한다고 했고, 조정의 개국공신들은 인수봉 안으로 쌓아야 한다고 했다. 공신들은 모두가 유생들이었다. 결국 인수봉 안으로 성을 쌓아야 한다는 주장이 통과되었다.

무학은 너무나 서럽고 울적하여 홀로 울었다. 그 후로 무학대사가 < 서러워 울었다 > 하여 < 한양 > 을 < 서울 >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또 한 가지 설은 < 성을 쌓을 당시 눈이 선을 긋듯 인수봉을 둘러쌌다 > 는 데서 눈 '설(雪)' 자와 울타리의 '울' 자를 따서 < 설울 > 이라 부르다 나중에 < 서울 > 로 변형되었다고 한다.

동북쪽으로 십리를 더 가니, 그곳이 바로 북악산 밑의 경복궁 터였다. 그 후 이곳은 십리를 더 가라는 뜻으로 < '갈 왕(往)'자에 '십리(十里)' > 를 붙여, 지금의 < 왕십리 > 가 되었다. 한편 일설에는 그 노인이 풍수지리에 능했다고 하는 도선국사의 후신이라고 하여 하왕십리 2동을 도선대사의 이름을 따서 < 도선동 > 이라 불렀다. 무학이 사찰 명당자리로 잡았던 곳은 무학재로 불리다가 < 무악재 > 로 바뀌었다.

 

< 정복규 논설위원, 한국의 성씨 강사 >

 

 

 

 

 

 

무학대사와 이성계(2)

 

무학 자초(自超,1327~1405)는 무학대사(無學大師)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의 성씨는 박(朴)씨지만 본관은 알 수가 없다. 무학(無學)은 그의 호다. 호는 불교의 가장 높은 단계에 이르러 더 배울 것이 없다는 무학(無學)이라고 한다. 혹은 어릴 때 강보에 싸여 버려진 그를 학들이 둘러싸서 보호했다고 하여 무학(舞鶴)이라고도 한다.

무학은 경상남도 삼기(지금의 합천)에서 문하사랑 박인일의 아들로 태어났다. 18세에 소지선사(小止禪師)의 제자로 승려가 되어 구족계를 받고, 혜명국사에게서 불법을 배웠다. 진주(鎭州) 길상사와 묘향산 금강굴 등에서 수도하다가, 1353년(공민왕 2) 원나라 연경에 유학하여 그때 원에 와 있던 혜근(惠勤)과 지공(指空)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1356년 귀국하여 1373년에 왕사(王師)가 된 혜근의 법을 이어받았다. 1376년 혜근이 회암사에서 낙성회를 연 때 수좌(首座)로 초청하였으나 사양했다. 1392년 조선 개국 후 왕사가 되어, 대조계종사(大曹溪宗師)의 호를 받고 회암사에서 지냈다.

이듬해 태조를 따라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는 데 찬성하였다. 1397년(태조 6) 왕명으로 회암사 북쪽에 수탑(壽塔)을 세웠다. 1402년(태종 2) 회암사 감주(監主)가 되었다가 이듬해 사직하고, 금강산 금장암에 머물다가 죽었다. 저서에 불조종파지도(佛祖宗派之圖), 인공음(印空吟)이 있다.

이성계는 젊은 시절 꿈을 꾸었다. 그는 해몽을 잘한다는 점장이 노파를 찾아갔다. 노파는 "설봉산 토굴의 스님에게 물어보라“고 말했다. 스님은 "그 꿈을 남에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마을의 닭들이 일제히 '꼬끼오'하고 울어 댄 것은 '고귀위(高貴位)'란 뜻이니, 반드시 고귀한 지위에 오른다는 뜻입니다. 낡은 곳간에 들어가서 서까래 세 개를 등에 가로 짊어졌으니, 그 모양이 바로 임금 왕(王)자와 같습니다."

스님은“아직도 삼 년의 시간을 기다려야 할 터이니, 그동안 절을 세워 오백 나한을 모시고 정성껏 기도를 드리십시오." 이성계는 자신의 출생지인 안변 땅에 절을 지었다. 그 절의 이름이 석왕사이고, 그 스님이 바로 무학대사다. 훗날 태조 이성계는 무학에게 새 도읍지를 물색해 달라고 했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닌 무학은 매봉산 봉은사에서 하룻밤을 지낸 뒤 아침 일찍 절문을 나섰다. 넓은 들판을 가로질러 뚝섬 나루에 오니 배가 한척 기다리고 있었다. 한강을 건넌 무학은 들을 바라보며 '여기야말로 새로운 도읍지로구나'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에 한 노인이 밭에서 소를 몰고 있었다. 그 노인은 "허, 이놈의 소, 미련하기가 무학보다도 심하구나. 어찌하여 곧은 길을 가려 하지 않고 자꾸 돌아서만 가려 하느냐?"

무학은 깜짝 놀라 노인에게 물었다. "방금 소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노인이 힐끗 돌아보며 말했다. "요즘 무학이라는 작자가 새 도읍지를 찾아다닌다고 하던데 좋은 곳은 다 놓아두고 엉뚱한 데만 찾아다니니 이 어찌 미련하고 한심한 일이 아니겠소." 무학은 노인이 보통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노인에게 공손히 합장하고 말했다.

"소승이 바로 그 미련한 무학입니다. 제 소견으로는 이곳이 새 도읍지로 적격이라고 생각했는데, 노인장께서 소승에게 한수 가르쳐 주십시오." 노인은 채찍을 들어 한 쪽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여기서 10리를 더 가서 지형을 살펴보도록 하시오."

무학이 정중히 허리를 굽히며 노인에게 인사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보니 노인과 소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고개를 갸우뚱한 무학은 노인이 가르쳐 준 대로 서북쪽으로 10리를 걸었다. 그렇게 해서 당도한 곳이 바로 경복궁 자리였다.

이곳은 주변의 경관도 경관이려니와 지세가 너무나 새롭게 뻗어 나가고 있었다. 삼각산을 주봉으로 하여 남산이 안산으로 알맞게 자리했다. 인왕산이 한 녘에서 기운을 북돋아 주고 있었다. 그는 삼각산 인수봉에 올랐다. 거기는 한 노승이 5백 나한에게 예배하는 형국을 띤 자리였다. '그래, 이 인수봉을 안으로 넣고 성을 쌓으면 불교도 오랫동안 민중들 속에서 제 구실을 다할 것이로다'

무학은 그 다음 인왕산에 올랐다. 산에 올라 삼각산 자락을 내려다보니, 참으로 명당 중에 명당은 자신이 처음 당도했던 그곳이었다. 그는 남산으로 올랐다. 북쪽으로는 아늑한 지세가 자리하고 있었고 남쪽으로 한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그 너머로 자신이 지나온 청계산이 아련히 보였고, 과천 쪽으로는 관악산이 우뚝 서 있었다.

태조도 크게 기뻐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도성을 어디에다 쌓느냐는 것이었다. 무학은 인수봉 밖으로 쌓아야 한다고 했고, 조정의 개국공신들은 인수봉 안으로 쌓아야 한다고 했다. 공신들은 모두가 유생들이었다. 결국 인수봉 안으로 성을 쌓아야 한다는 주장이 통과되었다.

무학은 너무나 서럽고 울적하여 홀로 울었다. 그 후로 무학대사가 < 서러워 울었다 > 하여 < 한양 > 을 < 서울 >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또 한 가지 설은 < 성을 쌓을 당시 눈이 선을 긋듯 인수봉을 둘러쌌다 > 는 데서 눈 '설(雪)' 자와 울타리의 '울' 자를 따서 < 설울 > 이라 부르다 나중에 < 서울 > 로 변형되었다고 한다.

동북쪽으로 십리를 더 가니, 그곳이 바로 북악산 밑의 경복궁 터였다. 그 후 이곳은 십리를 더 가라는 뜻으로 < '갈 왕(往)'자에 '십리(十里)' > 를 붙여, 지금의 < 왕십리 > 가 되었다. 한편 일설에는 그 노인이 풍수지리에 능했다고 하는 도선국사의 후신이라고 하여 하왕십리 2동을 도선대사의 이름을 따서 < 도선동 > 이라 불렀다. 무학이 사찰 명당자리로 잡았던 곳은 무학재로 불리다가 < 무악재 > 로 바뀌었다.

무학대사가 터를 잡아 지은 유명사찰과 고궁은 여러 곳이다. 자운암은 서울 관악구 신림동 관악산에 있다. 1396년(태조 5년) 무학대사가 창건했다. 관악산은 원래 풍수상으로 화산(火山)으로 태조 이성계가 산의 화기를 막기 위해 경복궁 앞에는 해태가 지키게 하고 관악산 중턱에는 물동이를 묻었다.

호압사(虎壓寺)는 서울 금천구 시흥2동 234 호암 산에 있다. 1391년(태조 2년) 무학대사가 창건했다. 태조 이성계의 꿈에 호암 산의 호랑이인 산신령이 나타나 산의 기운을 잡아줄 터를 점지해 줌으로서 그 터에 절을 창건했다.

사자암(獅子菴)은 서울 동작구 상도동 280 삼성산에 있다. 1398년(태조 때) 창건됐다. 무학대사는 삼성 산과 인근 호암 산의 기가 너무 강하여 풍수상 한양에 좋지 않다하여 사자형상을 띈 삼성 산에는 사자암을, 호암 산에는 호압사를 세워 두 산의 기를 눌렀다.

죽림사는 경기 안성시 일죽면 방초리에 있다. 고려 공민왕 즉위 때 창건됐다. 간월암은 충남 서산시 부석면 간월도리에 있다. 철새 도래지로 유명한 간월호에 있으며 무학대사가 수도 중 달을 보고 깨우쳤다하여 간월암 이라고 하였다. 간월도는 간조 때 육지와 연결되고 만조 때에는 작은 섬이 된다.

반야사는 충북 영동 백화산에 있다. 720년 의상대사의 제자 상원이 창건한 절이다. 이 절은 무학대사가 꽂아 두고 간 그의 지팡이가 어느 날 둘로 쪼개어지면서 뿌리를 내렸다는 5백년 된 배롱나무의 전설이 있다.

한편 의정부시의 문화제인 회룡문화제의 회룡(回龍)이라는 말은 의정부 내에 회룡사가 있기 때문이다. 회룡사(回龍寺)로 불리게 된 것은 고려 우왕 10년(1384)에 무학대사가 중창을 한 뒤이다.

여기에는 이성계와 관련된 전설이 전한다. 1384년 이성계는 무학과 함께 이 절에 와서 3년 동안 창업성취를 위한 기도를 했다. 이때 태조는 지금의 석굴암, 무학은 산등성이 가까이에 있는 무학굴에서 각각 기도를 드렸다. 그 뒤 이성계가 동북 병마사가 되어 요동으로 출전하자 무학은 홀로 남아 작은 절을 짓고 손수 만든 관세음보살상을 모시고 그의 영달을 축원한다. 왕위에 오른 이성계가 이곳으로 무학을 찾아와서 절 이름을 회룡사라고 개칭했다. 이는‘임금이 되어 돌아왔다’는 뜻이다.

태종 3년(1403) 태조는 끈질긴 함흥차사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돌아오지 않았다. 무학대사가 찾아가 설득하자 노여움을 풀고 귀경한다. 귀경한 후 이 절로 무학을 찾아왔다. 무학이 회란(환궁) 용가(태조가 타던 수레)를 기뻐하여‘회룡사’라고 했다는 설도 있다.

 

 

 

 

( 정복규 논설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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