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이씨 운천군파 (비금소종회)

[퍼온글] 왕의 호칭( 자, 휘, 호, 존호, 시호, 묘호, 능호)

블랙썬 2019. 8. 1. 10:34


왕의 호칭 (자,휘,호,존호,시호,묘호,능호)


출처 : http://blog.daum.net/magpie_kor/7396009




태어나면 왕은 태어날 때는 이름을 갖지 않고,

왕의 적장자로 태어나면 원자가 될 뿐이다.

 

자(字) 관례를 행하면서 받는 호칭.

일생동안 명심해야 할 훈계 또는 축복의 내용을 담은 두 글자.

 

휘(諱) 이름.

왕의 이름은 함부로 부를 수 없어서 잘못하여 글로 쓰거나 하면 큰 벌을 받았다.

금기의 글자였던 만큼 조선시대 사람들은 역대 조선왕의 이름을 죽 외우고 있어야 했다.

그래야, 상소문, 과거시험, 문장 등을 쓸 때 그 글자를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잘 쓰지 않는 특이한 글자나 새로 글자를 만들어 썼다.

 

휘(諱)란 무엇이며, 불휘가 행해진 까닭에 대해서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휘란 한국, 중국, 일본 등에서 왕이나 귀족 등의 이름을 말할 때 쓰는 말이다.

원래는 왕이나 귀족이 죽은 뒤에는 살아있을 때 이름을 삼가서 부르지 않는다는 뜻에서 만들어진 말이다.

불휘(不諱)란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의 이름과 같은 글자를 쓰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풍습은 대체로 중국 진나라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불휘(不諱)하는 방법에는 글자를 다른 것으로 바꾸는 것, 그 글자를 빼는 것, 획을 빠트리는 것 등이 있다.

따라서 휘(諱) 때문에 지방의 이름이나 관청의 이름이 바뀌는 경우도 많았다.

우리 나라에 불휘(不諱) 제도가 들어온 것이 언제인지에 대해서는 잘 알 수가 없으나, 삼국 시대의 문헌과 금석문에 불휘(不諱)한 보기가 많다.

 

신라 문무왕의 비문에 세운 날짜를 '경진년', 신라 진성여왕 때 세운 숭복사 비문에는 '경오년'이라고 새겨져 있다. 이것은 본디 '병진년' '병오년'이라고 새겨져 있다.

이것은 당나라 고조의 아버지 이름인 '병'자의 음을 피하기 위하여 '경진년'과 '경오년'으로 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왕의 휘를 피한 보기는 고려 때의 금석문에서 볼 수 있다.

 

봉암사의 정진대사 탑비문을 보면 '문호 양반'이라는 글귀가 나오는데, 원래는 '문무 양반'이라고 해야 한다. 고려 혜종의 휘인 '무'를 피하기 위하여 '호'를 쓴 것이다.

이들 뿐만 아니라 <삼국사기> <삼국유사> <균여전> 같은 옛문헌이나

여러 선현들의 글씨와 그림을 새긴 현판에는 불휘한 것이 많다.

이들 문헌이나 현판에서 내용에 걸맞지 않는 글자가 보일 때는 우선 그것이 불휘한 것인지 알아보는 것도 중요한 역사 공부라 할 수 있다.

 

호(號)

자신이 스스로를 표시하기 위해 붙이거나 스승 또는 친구들이 붙여주는 일종의 별명.

 

존호(尊號)

왕이 훌륭한 업적을 이룩한 경우, 신료들이 왕의 업적을 찬양하기 위해 올리는 호칭.

 

시호 (諡號)

왕이 죽었을 때 그의 일생을 평가하고, 공덕을 기리기 위해 짓는 호칭.

- 고관 또는 공훈이 있는 사람에게 사후에 주는 존칭.

조선의 왕은 중국에서 두 글자의 시호를 받고,

미진한 경우 신료들이 네 글자의 시호를 더 올리는 경우도 많았다.

그리고, 왕후 앞에 붙는 명칭도 '시호'이다.

 

▷ 시호의 기원은 중국에 있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신라 법흥왕 원년(514년)에 죽은 부왕에게 '지증(智證)'이라는 시호를 올렸다는 기록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시호제도가 정비된 것은 조선시대부터이다.

시호를 정하는 절차와 방법은 매우 엄숙하고 까다롭게 진행되었다.

 

특히 국왕이나 왕비가 죽은 경우에는 시호도감을 설치하고 시책을 올리도록 했다.

시호에 쓰는 글자는 정해져 있었다.

조선 초기 사용하던 글자는 모두 194자였으나 글자수의 부족으로 시호를 정하기 어려워 세종의 명에 의해 집현전에서 107자를 첨가, 그후 모두 301자를 사용했다.

그러나 자주 쓴 글자는 문(文), 정(貞), 공(恭), 정(靖), 양(良), 효(孝), 충(忠) 등 120자 정도에 불과했다. 이 글자들은 모두 몇 가지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예> 문(文)

온 천하를 경륜하여 다스린다.

배우기를 부지런히 하고 묻기를 좋아한다.

도덕을 널리 들어 아는 바가 많다 / 충심으로 남을 사랑한다.

널리 듣고 많이 본다.

 

등 15가지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의미 가운데 돌아가신 분의 행적에 맞는 글자를 선택, 시호를 올리는 것이다.

 

시호에 관한 자료를 더 살펴보면,

중국 봉건제도의 특징은 엄격한 신분구별에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회의 안정을 기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임금과 신하, 양반과 평민, 어른과 아이, 부모와 자식, 부부는 물론이고

남자와 여자, 심지어는 적서(嫡庶)까지 분명하게 구별해 놓고는 복종을 강요했다.

 

우리의 양반계층이나 상민계층도 이로부터 영향받은 바 크다.

자연히 생활양식은 물론 심지어는 계층간에 사용되는 언어나 용어에도 차별이 있었다.

 

예를 들어보자. 다같은 ‘죽음’이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은 천차만별이었다.

즉 천자는 붕(崩), 제후(諸侯)는 흥(薨), 고관이나 선비는 졸(卒)이 되나 평민들은 사(死)라고 표현했다. 물론 역적(逆賊)이 죽는 것은 폐(斃)라고 했다. 일종의 ‘개죽음’을 뜻한다.

 

또한 칭호에서도 특이한 제도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이름은 태어나면서 짓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과거 봉건시대에는 일부 계층에 한해 죽어서도 이름이 붙는 경우가 있었다.

이른바 시호(諡號)라는 것이다.

 

대체로 왕이나 왕비, 왕족, 고관대작(高官大爵)이 죽으면 생전의 업적(業績)을 가려 일정한 칭호를 내렸다.

그것을 증시(贈諡), 죽고 나서 한참 뒤에 내리면 추시(追諡), 시호(諡號)를 바꾸는 것을 개시(改諡) 라고 했다.

이 밖에도 명망있는 학자의 경우, 친구나 가족들이 시호(諡號)를 결정하기도 했는데 그것을 사시(私諡) 라고 했다.

 

제왕(帝王)의 경우에는 예관(禮官)의 품주(稟奏)에 따라 계위한 제왕이 윤허(允許)함으로써 결정되는데, 크게 표양(表揚 文과 武)과 비판(批判 靈,煬,悼 등), 동정(同情 哀,愍)의 경우가 있었다.

또 고관(高官)은 조연(朝廷)에서 결정해 내렸다.

조선시대의 경우, 정2품 이상으로 국한했는데, 후손들이 선정한 고인의 행장(行狀)을 예조(禮曹)에 제출하면 봉상시(奉常寺)와 홍문관(弘文館)에 보내 결정했다.

대체로 생전의 업적에 따라 文,武,貞,正,恭,忠,良,익(翼),정(靖)과 같은 좋은 의미의 글자 2∼3자를 사용했다.

 

참고로 이순신(李舜臣) 장군은 충무(忠武),

을사조약에 반대해 자결한 민영환(閔泳煥)선생은 충정(忠正),

퇴계(退溪)선생의 시호(諡號)는 문순(文純)이다.

 

중국 주(周)나라 때부터 시행된 본 제도는 우리나라의 경우,

신라 법흥왕(法興王) 1년(514)에 지증(智證) 사후‘智證’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는 기록이 있는데 아마도 최초가 아닌가 한다.

 

묘호(廟號) 왕의 삼년상이 끝나고 신주가 종묘에 들어가면 종묘에서 그 신주를 부르는 호칭.

신료들이 왕의 일생을 평가하여 공이 많다고 여기면 '조'를 붙이고,

덕이 많다고 여기면 '종'을 붙여서 두 글자로 지었다.(이것은「예기」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조'와 '종'에는 어떤 정해진 규칙이 없고,

신료들의 평가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들로 내려가면 '종'이고, 아니면 '조'다 라든가,

적자이면 '종', 아니면 '조' 등등의 말은 옳은 이야기라고는 할 수 없다.

 

<증명 I >

선조(중종의 서손, 덕흥대원군의 아들)

처음의 묘호 = 선종 -> 공보다 덕이 앞선다고 평가함.

바뀐 묘호 = 선조 ->임진왜란 때 왜구를 물리친 공이 있다는 근거로 허균과 이이첨이 주장.

<증명 II> 중종 (성종과 정현왕후 윤씨사이의 아들)

묘호가 바뀌진 않았으나, 연산군을 몰아낸 큰 공을 인정하여 '중조'로 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었음.

따라서 정해진 원칙은 없으며, 공이 있으면 '조', 덕이 있으면 '종'이라는 신료들의 평가에 달려있을 뿐이다.

 

다음은 "고구려 본기"의 한 부분을 인용한 부분이다.

태조'라는 묘호에 담긴 역사적 의미

한국과 중국 및 일본 역사를 통틀어 '태조'라는 묘호를 처음 사용한 국가는 고구려이다.

흔히 태조라는 칭호는 국가를 세운 사람에게 붙여지는 묘호인데,

어째서 고구려 제6대조에 처음으로 붙여지게 되었을까?

이것은 단순히 '큰 할아버지' 또는 '큰 조상'이라는 뜻이었을까?

 

중국의 예를 들어보자. 왕의 묘호에 '조' (祖)를 붙이기 시작한 것은 서한 시대부터이다.

동한은 서한을 잇는다는 의미에서 고조라는 묘호를 사용하지도 않았다.

동한 이후에는 모든 왕의 묘호에 '제' (帝)를 사용하였고, '조'를 사용한 예는 없다.

그러다가 당(唐)나라 시대에 와서 다시금 '조'를 사용하였으며,

이때부터 묘호에는 '조'와 '종'의 개념이 등장한다.

 

중국 역사에서 태조라는 묘호가 처음으로 나타나는 것은 남북조 시대이며, 상용화된 것은 5호 16국 시기이다.

그러나 5대 시기에도 고조와 태조가 혼재되어 있다.

중국의 역사에서 건국자를 태조라고만 칭하기 시작한 나라는 송나라 때부터이며,

송,원, 명, 청 등은 건국자를 모두 태조라고 칭하고 있다.

이처럼 중국 역사에서 태조라는 칭호를 사용한 시기는 고구려에 비해 한참 뒤의 일이다.

 

5대의 시기가 907년에 시작되는 사실을 감안할 때 고구려는 그보다 약 700년 앞서서 태조라는 묘호를 사용했던 것이다.

때문에 묘호라는 묘호의 기원은 고구려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고구려 6대왕 태조역시 '나라를 세운 사람'이라는 뜻으로 붙힌 칭호이었을까?

아마도 고구려의 6대조는 고구려인들에게 단순히 6대조 이상의 특별한 의미가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고구려인들은 왜 하필 제 6대 황제에게 처음 황제에게나 붙일 법한 태조라는 묘호를 올린 것일까?

이는 태조의 업적과 깊은 관련이 있는 듯하다.

태조 시대 고구려는 대대적인 고토회복운동을 벌여 고조선의 고토를 거의 회복했다.

또한 이때 고구려는 동한과 숱한 전쟁을 벌여 군사적 우위를 확보하는 한편,

산동 지역 아래쪽까지 세력을 뻗혀 대륙의 맹주로 자리하게 된다.

이 같은 국력의 강성으로 고구려는 황제국의 면모를 갖추게 되고,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고구려인들이 제6대 임금을 태조라고 붙인 것은

그가 고구려를 재탄생시켰을 뿐 아니라 고구려가 종주국(황제국)이었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고구려는 태조대에 힘이 막강해져 국제사회에서 종주국의 지위를 확보하고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 이래 꾸준히 그 상황을 이어갔던 것이다.

 

조선시대의 왕은 사후에 자신이 살았던 일생을 평가받는다.

시호(諡號)와 묘호(廟號)가 그것이다.

시호는 살았을 때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올리는 칭호이다.

묘호는 왕의 일생을 평가하여 정하며 종묘에서 부르는 호칭이기도 하다.

태조, 정종, 태종, 세종 하는 등의 칭호가 묘호다.

묘호의 뒤에는 조(祖)와 종(宗)이 붙는데, 보통 조는 공(功)이 탁월한 왕에게 붙이고, 이에 비해 덕(德)이 출중한 왕에게는 종(宗)을 붙인다.

 

따라서 창업군주에 버금가는 중흥군주에게 종이 붙는다.

대체로 피바람을 일으킨 왕들이 조가 된다고 할 수 있다.

태조 이성계를 비롯하여 세조, 선조, 인조, 영조, 정조, 순조 등이 그에 해당한다.

사학자 신명호씨에 따르면 조를 붙일지, 종을 붙일지는 후세의 평가에 달려 있다고 한다.

 

심한 경우에는 이미 정한 묘호를 바꾸는 경우도 있다는 것.

예컨대 선조의 경우 처음의 묘호는 선종이었다고 한다.

 

공보다는 덕이 앞선다고 평가한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허균과 이이첨이 주장하여 이를 선조로 바꾸었다.

임진왜란때 왜구를 물리친 커다란 공이 있다는 것이 그 근거였다.

 

또 중종의 경우는 연산군을 몰어낸 큰 공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여 중조로 하자는 주장이 인종에 의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신료들의 반대로 그냥 종을 붙이는 쪽으로 결정되었다.

폐위된 왕에게는 군(君)이라는 호칭이 붙었다.

왕으로서 조선시대 유교적 질서에서 크게 벗어난 부도덕한 행위를 저지른 군주에게 붙여졌다.

연산군과 광해군이 그들이다.

이들은 왕의 자격을 박탈당한 군주이기에 종묘상의 묘호도 없다.

 

능호 (陵號) 왕의 무덤을 지칭하는 호칭.

왕의 무덤을 '능'이라 하여 존중했다.

능은 구릉이란 의미인데, 왕의 무덤이 구릉처럼 크고 웅장하다는 의미다.

이렇게 많은 호칭을 어떻게 표기할까요?

 

왕의 칭호는 보통 붙여서 쓰는데,

그 순서는 보통 ① 묘호 ② 중국에서 내려준 시호 ③ 존호 ④ 신료들이 올린 시호 순입니다.

 

예를들어, 세조의 정식 호칭 ①세조 ②혜장 ③승천체도열문영무 ④지덕융공성신명예흠숙인효 [세조혜장승천체도열문영무지덕융공성신명예흠숙인효]

우리가 보통 태조, 세종, 성종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길고도 긴 호칭의 맨 앞에 위치한 '묘호' 두 글자만 부르는 것입니다.

 

 

출처: 대한항실재건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