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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 조선왕들의 시호와 묘호 그리고 능호

블랙썬 2019. 8. 1. 11:52

조선왕들의 시호와 묘호 그리고 능호


| 역사상식

장손 |조회 109 |추천 0| 2015.01.29. 09:13

    

 

시호(諡號)와 묘호(廟號), 능호(陵號)

 

 

① 시호(諡號) 

살아 생전의 업적을 평가하여 그에 맞는 이름을 붙인 것, 인간으로서 왕이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종합적으로 보여준다.

 

 

시호(諡號) 결정

 

유교에서는 사람이 죽은 후에 살아 생전의 모든 업이 이름으로 남는다고 가르친다.

죽어서 남기는 이름을 시호(諡號)라고 하는데, 죽은 이의 일생이 함축되어 있다.

시호는 유교 문화의 산물로서, 천국과 지옥이 따로 없는 유교에서는 최후의 심판과도 같았다.

 

조선 시대 왕과 왕비는 국상이 나고 5일이 지난 후 논의하여 결정했다.

시호를 결정하는 단계를 살펴보자.

 

먼저 왕의 삶을 철저하게 조사, 기록한 행장(行狀, 출생에서 사망까지 행한 모든 언행을 모아서 기록한 글)을 만들었다. 행장은 승정원의 주서가 승정원일기에서 왕의 일생을 요약, 조사해 올리면 이 자료를 참고해 당대 최고의 문장가인 대제학이 짓고 최종적으로 의정부 정승들이 모여 결정했다.

 

행장이 완성되면 중국 황제에게 청시사(請諡使)를 보내 행장을 첨부해 올리며 시호를 결정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면 이를 검토하여 시호 두 글자를 정하여 보내주었다. 여기에 조선에서 추가로 정하여 올렸다.

 

시호를 관장하는 기구는 봉상시 시허에 사용될 글자들을 모아 예조에 올려 검토한 다음 이를 의정부에 보고하면 의정부에서는 2품 이상의 관료들이 모여 시호를 의논하였다.

 

왕의 시호의 글자 수는 4자, 6자, 8자로 하였는데 특별한 공적이 있는 왕에게는 4자를 더하여 12자를 올리기도 하였다. 왕비는 두 글자로 정했다.

 

결정된 시호는 의정부에서 왕에게 보고하면 왕이 이를 검토하고 최종 결정하였다.  

예를 들어 세종의 시호는 10자로 다음과 같다.

   장헌 영문 예무 인성 명효(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

 

   

 

② 묘호(廟號) 

본질적으로 시호와 같은 의미를 가지나 왕으로서의 역할을 얼마나 훌륭하게 수행하였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정했다. 묘호는 오직 왕만이 소유하였으며, 태조, 태종 등과 같이 왕을 대표하는 이름이다.

      

묘호는 두 글자로만 이루어졌는데 앞 글자는 각자 다르지만 뒤의 한 글자는 조(祖)나 종(宗)이었다. 왕의 업적을 기준으로 후계왕과 신료들에 의해 결정되었다. 2품 이상의 재상들이 왕에게 세 가지 묘호를 추천해 보고하면 왕이 이 중에서 하나를 선정했는데, 대개는 첫 번째 것을 정했다.

 

왕의 업적을 평가하는 항목은 공(功)과 덕(德), 두 가지였다. 공(功)은 무질서와 혼동을 바로잡는 대업을 이룬 경우이고, 덕(德)은 선대 왕들이 확립한 훌륭한 정치 이념을 계승하여 태평성대를 계속 이어가는 경우이다. 왕의 공을 표시하는 글자는 조이고, 왕의 덕을 표시하는 글자는 종이다. 묘호에 조(祖)자가 들어간 왕은 혼란기에 국가를 창업하거나 중흥하는 대업을 완수한 왕으로 평가받은 것이고 종(宗)자가 들어간 왕은 선대의 정치 노선을 계승하여 통치한 왕으로 평가받았다고 보면 된다.

 

 

쉬운 설명

 

태조, 태조 등 우리가 왕을 부를 때 사용하는 명칭을 묘호(廟號)라고 합니다.

 

묘호는 생전에 부르던 것이 아니라, 그 왕이 죽은 후에 종묘에 신위(왕의 위패)를 모실 때 드리는 존호(尊號)입니다.

 

 

묘호는 중국에서 받아들인 것으로, 회원님이 질문한 것처럼 조(祖)와 종(宗)의 두 가지를 사용하였어요.

 

우리나라 문헌상 조(祖)와 종(宗)의 묘호를 처음 사용한 왕은 무열왕으로 태종이라는 묘호를 사용하였어요(흔히 태종 무열왕이라 부르죠?). 그러나 신라는 무열왕 이후 아무도 이를 사용치 않았어요. 그러다가 고려 때부터 묘호를 본격 사용하여 조선 시대 때까지 계속 유지하였습니다.

 

고려 시대에는 태조만이 ‘조(祖)’의 묘호를 가졌으며, 그 밖의 모든 왕은 ‘종’의 묘호를 가졌습니다(원 간섭기에는 부마국의 지위에 따라 조, 종 때신 왕을 붙임). 조선 시대에는 ‘조’의 묘호를 붙인 왕이 무려 7명(태조․세조·선조·인조·영조·정조·순조)이었습니다.

 

 

조(祖)와 종(宗)의 묘호는 어떤 원칙에 의해 붙였을까요?

 

조나 종을 쓰는 데는 꼭 일정한 원칙이 있었던 것은 아니나, 대체로 조는 나라를 처음 건국한 왕 또는 나라의 정통이 중단되었던 것을 다시 일으킨 왕에게 쓰고, 종은 왕위를 정통으로 계승한 왕에게 붙였습니다.

 

반정(反正, 정변, 쿠데타)을 통해 왕위에 오른 경우이거나 또는 재위시에 큰 국난을 치렀던 왕은 대체로 조의 묘호를 붙였습니다. 즉, 반정을 통해 왕위에 오른 인조(호란 극복도 포함), 임진왜란이라는 위기를 치른 선조, 홍경래의 난을 치른 순조, 반정은 아니지만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세조가 해당하죠.

 

선조․영조·정조·순조는 본래 선종․영종·정종·순종으로 정하였던 묘호를 후에 조로 고쳤던 경우입니다. 선조는 광해군 때 다시 고친 것이고 영조와 정조는 고종 때, 순조는 철종 때 이를 개정한 묘호입니다.

 

반면, 특이한 것은 중종의 묘호입니다. 알고 있듯 중종은 반정을 통해 연산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으니 위에 말한 일반적 원칙에 따르면, 중종이 아니라 중조라는 묘호를 받았어야 했죠. 인종 초에 왕이 교서를 내려 “선왕이 난정(亂政)을 바로잡아 반정을 하여 중흥의 공이 있으므로 조로 칭하고자 한다.”고 했으나, 묘호를 정하는 주관 부서의 예관(禮官)이 “선왕이 비록 중흥의 공이 있기는 하나 성종의 직계로 왕위를 계승했으므로 조로 함이 마땅하지 않다.”고 하여 중종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③ 능호(陵號)

 

왕릉의 이름이다.